[스몰스토리] "한글인데 왜 돈 내?" 한글서체의 현실

한글의 모양을 다듬는 사람들
폰트 한 벌 위해 2350자 모두 디자인해야
‘한글을 왜 돈 내고 써야되냐’ 묻기도
1446년 세종대왕이 반포한 한글을 오늘날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세종대왕은 까막눈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디자인으로 한글을 재창조한다. 자판만 두드리면 온갖 한글이 화면을 장식하는 시대지만 서체를 만드는 한글 디자이너의 새로운 창작은 멈출 줄 모른다. 571돌 한글날, 한글 서체 디자이너의 삶 혹은 현실을 들여다봤다.
폰트하형원(25) 디자이너는 '폰트'를 만든다. 폰트는 정해진 글자 형태와 크기를 가진 활자 한 벌을 뜻한다. 모니터 속 누구체, 무슨체 등이 대표적이다. 폰트의 이름이다. 조선시대 문신 추사 김정희가 만든 ‘추사체’처럼 하 씨가 만든 서체에도 이름이 있다. ‘됴웅체’다. 목판 글자를 폰트로 다듬어 재탄생시켰다. 2016년 대학 졸업전시회에서 선보인 뒤, 현재 판매 중인 서체다.
한글 폰트를 만드는 일은 녹록치 않다. 한글은 조합형 글자다. 영어와 달리 초성, 중성, 종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가’, ‘고’, ‘각’에 쓰이는 자음은 모두 ‘ㄱ’이지만, 형태적으로는 모두 다른 'ㄱ'이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조합에 따라 디자인적으로 형태를 달리 한다.

이 탓에 디자인해야하는 경우의 수가 많다. 국어사전에 명기된 표준 글자로 폰트 한 벌을 만들기 위해 2350자가 필요하다.'뷁'처럼 외계어마냥 통용되지 않는 글자까지 고려하면 1만1172자까지 만들어야한다. 반면 영어는 26자로 구성된다. 알파벳 단어는 초 중 종성이 없을뿐 아니라, 영문 외계어라고 해도 붙여쓰면 그만이다. 대소문자와 문장부호를 포함하면 200자 내외로도 폰트를 만들 수 있다.
하씨가 꼽은 한글 폰트 제작의 어려움도 이와 같다. 특히 폰트를 만들다보면 기존 구상과 달리 글자가 주는 인상이 조합에 따라 달라질 때가 있다. '왝'의 받침 'ㄱ'과 '웩'의 'ㄱ'의 인상이 달라질 수 있어서다. 서체 디자이너만이 느끼는 오묘한 차이다.

이처럼 특정 자음이나 모음 하나만 수정하려고 해도, 수백 개의 조합어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디자이너의 기준에 부합하는 서체 한벌을 만드는데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럴듯한 폰트 한 벌 만드는데 짧아도 6개월은 소요된다. 완성도는 결국 시간과 비례한다. 됴웅체는 완성에 2년이 걸렸다.

레터링서체를 빼고 이미지와 텍스트로 이루어진 디자인을 논할 수 없다. 폰트까진 아니더라도 제목용 글자, 포스터, 로고 등 한글 디자인이 필요한 작업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모든 한글 폰트를 만들 필요는 없다. 필요한 서체만 따로 디자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레터링(lettering)’이라 한다.
강민경(25) 디자이너는 작년부터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레터링'을 만든다. 이미지 작업에 어울리는 글자까지 새로 디자인한다. 글자에 형태를 조합하고, 장식을 추가해 기존에 없던 글자 모양을 레터링한다. 이미지적 특이성이 핵심이라 문자적 가독성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제목용으로 뛰어나다. 로고, 포스터, 책자 등 다양한 매체에서 레터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레터링도 폰트처럼 완성된 컴퓨터 파일이다. 시작은 손그림이다. 격자 종이에 직접 글자를 스케치한다. 손글씨가 시각적으로 읽기 편해서다. 이 글자를 컴퓨터로 옮긴 후 수정한다. 그래픽 이미지처럼 글자 디자인도 끝없는 수정을 거친다.레터링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강씨는 폰트와 레터링의 차이를 자주 설명한다. 오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폰트는 제작 후 파일을 받아 자판만 두드리면 제목이든, 본문이든 어디에나 이용할 수 있다.

반면 레터링은 완성된 한 벌이 아닌 필요한 글자만 디자인한 결과물이다. 독립적으로 로고나 포스터에 자주 쓰인다. 레터링은 디자인 범위가 좁아진 만큼 폰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작 기간이 짧다는 장점도 있다.
인식

폰트나 레터링 디자이너들은 "노동 강도에 비해 보상이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한다. 보통 디자이너 폰트는 10만선원에 구입할 수 있다. 출판, 로고, 영상, 웹 등 상업적 사용 권리가 포함된 가격이다. 비영리 목적이라면 절반 가격에 살 수도 있다.

서체 제작은 다른 디자인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다. 글자와 조형에 대한 이해가 모두 필요하다. 폰트에 비해 레터링은 부가적 디자인 작업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너도나도 예쁜 폰트를 쓰고싶어하지만 제값을 지불하고 구매하려는 시장 수요는 적다. 유명 업체를 포함해 국내 서체 디자이너가 200여 명에 불과한 이유다.
저작권 문제도 크다. 현행 저작권법은 서체도안 자체를 저작물 내지 미술저작물로 인정하진 않는다. 그림과 달리 독자적 예술물로서 서체의 저작권적 가치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신 디자인보호법에 따라 컴퓨터 파일 즉 프로그램적 권리를 보장받는다. 서체 업계에서 저작권 대신 사용권이란 개념이 널리 쓰이는 이유다.

사용권 문의 가운데 서체 디자이너들이 접하는 황당한 질문은 ‘한글인데 왜 돈 내고 써야되냐’는 항의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에 왜 값을 매겨 되파느냐는 식으로 따지는 사용자들이 많다고 한다. 디자이너가 만든 창작물을 대하는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아무렇게나 만든 엉성한 무료 서체가 한글이 가진 조형성과 심미성을 헤치고 있다"고 한 디자이너는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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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김민성, 연구= 이재근 한경닷컴 기자 rot011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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