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명작 '산불', 창극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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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5일 국립극장서 개막6·25전쟁 한가운데였던 1951년 겨울, 소백산맥 자락의 한 산골. 전쟁의 영향으로 남자라고는 노인만 남은 이 마을에 빨치산 무리에서 탈출한 젊은 남자 규복이 찾아온다. 그는 과부 점례의 집에 몰래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고 점례는 대나무 숲에 은신처를 마련해 그를 돌봐준다. 점례의 친구 사월이는 이를 눈치채고 규복을 번갈아가며 돌봐주자는 제안을 한다. 이들은 남녀관계가 돼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육하다시피 하며 욕정을 채운다. 그러던 어느 날 공비 소탕을 위해 국군이 마을에 찾아와 규복의 은신처가 있는 산에 불을 지르려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진다.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희곡 산불이 창극으로 무대에 오른다. 국립창극단이 새 작품 ‘산불’을 오는 25~2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인다.산불은 차범석 작가(1924~2006)가 쓴 희곡으로 이진순 연극연출가(1916~1984)에 의해 1962년 초연됐다. 그동안 연극 외에 오페라 뮤지컬 등으로도 만들어진 인기 작품이다. 이성열 연출은 “산불을 창극으로 올리자고 제안했더니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흔쾌히 수락했다”며 “6·25전쟁이라는 특정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전쟁이라는 보편적인 상황과 그 속에 던져진 인간 본성을 파고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연출은 이번 공연을 위해 원작을 재창작하는 수준으로 다듬었다고 했다. 그는 “본래 이 희곡은 사실주의적 작품인데, 비사실적인 요소까지도 충분히 담아내도록 표현주의적 요소를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는 까마귀가 불길한 징조로 울기만 하는데 창극에서는 까마귀 분장을 한 앙상블(코러스 배우) 7명이 등장해 춤을 춘다. 국군이나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 남자들이 한 무리로 나와 전쟁에 의해 희생당한 한(恨)을 군무로 표현하는 장면도 있다. 원작에서는 주요 장면의 등장인물이 2~3명에 불과하다. 이대로 해서는 해오름극장의 큰 무대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는 점도 앙상블을 적극 활용토록 한 배경이다.
무대는 중간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주변을 대나무 숲과 언덕이 둘러싸고 있다. 대나무 숲은 점례·사월과 규복이 사랑을 나누는 공간인 동시에 마을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을 전체가 잿빛으로 뿌옇고 집의 토담은 무너져 있어 전쟁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외부에서 고립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은 관객이 평소 갖고 있는 도덕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극 중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준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