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신도림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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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서울 신도림동에 오리온식품기계가 있다. 골목에 있는 종업원 9명의 소기업이다. 이 회사는 최근 재미있는 기계를 완성했다. ‘오리온 전자메뉴 무인서빙시스템’이다. 손님이 자리에서 전자메뉴판의 요리를 선택하면 이 내용이 요리사에게 전달된다. 해당 요리는 장난감자동차처럼 생긴 운반차가 레일을 타고 좌석까지 배달해 준다. 음식점으로선 인건비를 줄일 수 있고 손님에겐 재미를 선사한다. 엄천섭 오리온식품기계 사장은 “제주도 초밥집 등 몇 곳에 설치했다”며 “네덜란드 호주 바이어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지방의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30년 이상 선반 밀링 프레스 등의 기계와 모터 기어 컨트롤러 등 각종 부품을 다뤄본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엄 사장이 개발한 기계는 충무김밥성형기 등 100종이 넘는다.
지붕 없는 창업대학 역할신도림동은 30년 전만 해도 연탄공장 화학공장 등이 밀집한 공장지대였다. 뒷골목에는 열처리 프레스 도금 등 뿌리기업들이 있었다. 지금 경인국도변은 고층빌딩숲으로 바뀌었고 영화관 호텔 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안양천변이나 도림천변에는 여전히 낡은 공장들이 있다. 이곳은 약 600개에 이르는 ‘소공인(종업원 10명 미만의 제조업체)’들의 요람이다. 주로 중견·중소기업으로부터 주문받아 금속을 가공하는 업체들이다. 이런 임가공은 부가가치가 낮다.
이들이 변신에 나서고 있다. 택한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오리온식품기계처럼 독창적으로 ‘나만의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 동네에 있는 한양기업(대표 정헌수)은 단순한 구조의 ‘TR감속기’를 개발 중이다. 감속기는 호이스트 로봇 등에 쓰이는 부품이다. 정 대표는 “기존 감속기는 기어가 서로 수평으로 맞물리지만 우리 제품은 비스듬한 경사 형태로 맞물려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효율이 높다”며 “내년 6월 이 제품이 완성되면 중국 등으로 수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는 공동 개발이다. 50대 기업인들이 만든 모임인 ‘K-메이커스’가 그 예다. ‘한국의 기술장인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모임에는 신도림동과 문래동 기업인 6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융합해 웨어러블 로봇 등을 개발할 계획이다.숙련기술 창업, 후속대책 긴요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30년 이상 해당 분야에서 땀흘린 장인들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창업해 반월 시화 파주 등 타지역으로 공장을 넓혀 나간 기업인이 부지기수이고 월드클래스 기업으로 성장한 곳도 여럿 있다. 신도림동과 인근 문래동은 지붕 없는 창업대학이자 신제품 개발의 전진기지다.
하지만 활발하던 이 지역 창업이 최근 들어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불황 탓에 젊은이들의 유입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달 초 정부가 발표한 ‘혁신창업 생태계 조성 방안’엔 숙련창업도 들어 있어 이들 지역에서의 창업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현장 기술을 익힌 임직원들의 노하우와 아이디어,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게 확실하다. 삼영기계 대모엔지니어링 공간정밀 현대호이스트 등 이곳 출신 창업자들이 세운 기업들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게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성공 사례는 가뜩이나 대가 끊겨 가는 숙련기술자들을 양성하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숙련기술인 창업을 부추길 수 있도록 정교한 후속 조치와 예산 뒷받침이 긴요하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