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폭력 얼룩진 러시아혁명 100년, 트라우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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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러시아 1891~19912011년 가을 ‘시간의 법정’이라는 러시아의 한 TV 쇼 프로그램에서 모의재판을 열었다. 피고는 러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 시청자들이 변호사, 증인, 배심원 등으로 참여해 시청자의 전화투표로 판결을 이끌어냈다. 70년 이상 러시아를 지배한 사회주의 혁명도 재판대에 올랐다.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456쪽/ 1만8000원
결과는 의외였다. 적어도 비(非)러시아인들이 보기엔 그랬다. 스탈린의 반농민전쟁과 집단화가 초래한 재난과도 같은 결과의 증거를 접하고 나서도 시청자의 78%는 농촌집단화가 소련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악’이었다고 여겼다. 22%만이 그것을 범죄로 간주했다. 소련 붕괴에 대해서는 91%가 ‘국가적 재앙’이라는 평결에 동의했다. 지난달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10월 혁명’에 대한 긍정·부정적 견해가 46%로 똑같이 나왔다고 한다.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주의 체제가 막을 내린 지 사반세기가 넘었지만 러시아인들의 뇌리엔 ‘혁명’의 기억과 향수가 짙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볼셰비키의 기만적 책동에 의한 대참사’ ‘아래로부터 분출된 대중혁명’ 등 엇갈리는 평가만큼이나 러시아 혁명은 복합적 의미를 가진 대사건이었다는 얘기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7년 10월25일(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7일)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되짚어보는 책이다. 영국 런던대 버벡칼리지에서 러시아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저자 올랜도 파이지스가 쓴 이 책의 특징은 혁명의 기간이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대부분의 책들은 혁명이 일어난 1917년 전후의 짧은 시기, 길어야 1920년대 말까지만 다룬다. 하지만 저자는 혁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1891년의 제정 러시아 말기부터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에 이르기까지 100년을 하나의 사이클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 제목이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러시아(Revolutionary Russia)’인 이유다.혁명의 전조는 1891년 대기근에서 나타났다. 가뭄과 한해(寒害)가 겹친 데다 콜레라와 티푸스까지 창궐해 사망자가 속출하는데도 차르 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화를 키웠다. 그 결과 기근이 러시아 사회를 정치화했고, 반정부적 저항이 조직화되면서 혁명의 씨앗을 심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로부터 펼쳐진 혁명이 100년에 걸쳐 부침하는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3개 세대에 주목한다. 첫 번째 세대는 1870~1880년대에 태어나 10월 혁명을 주도하고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에 제거된 ‘구 볼셰비키’ 세대다. 지하조직 활동을 통해 투쟁한 이들은 유토피아적 이상, 군대와 규율의 금욕적 당 문화로 차르 체제를 몰락시키고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다. 하지만 개인주의적 습성과 가부장적 관습에 찌든 농업국가 러시아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세대는 스탈린식 근대화의 비전에 열광한 세대들이다. 1928~1932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되는 혁명의 두 번째 사이클은 새로운 세대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이 1930년대의 대숙청을 틈타 구 엘리트들을 대체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농촌 집단화는 100년 동안 지속돼온 농민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갈아엎으면서 국가 전체를 다시 원래대로 회복하지 못하도록 만든 일대 참사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혁명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국면은 흐루쇼프의 탈(脫)스탈린주의와 함께 공포정치에서 벗어나 해빙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확립한 ‘1960년대 사람들’이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이들은 스탈린 이전의 사회주의 이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꿈꾸는 한편 서구 문화와 소비생활에 열광했고 혁명의 종언에 이르렀다. 혁명의 전사(前史)부터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소련 붕괴까지 다루면서 저자는 최초의 유토피아적 이상에서 벗어나고 멀어지며 퇴락하는 상황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다.
저자는 “러시아인들이 공산주의 체제의 사회적 트라우마와 질환으로부터 치료를 받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며 “정치적으로 혁명은 죽었는지 모르지만 혁명은 100년 동안의 그 폭력적인 사이클 속에 휩쓸린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사후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