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기자의 알쓸커잡] 홍콩의 '후추 라테', 신세계를 맛보다

(15) 홍콩 커피 여행
홍콩. 나라 이름 중 유일하게 ‘ㅇ’ 받침이 연속되기 때문일까. 소리 내어 발음할 때마다 머릿속 묘한 울림이 한참이나 계속됩니다. 그 뜻마저도 향기로운(香) 항구(港). 어릴 때 자주 봤던 영화 때문인지 홍콩을 떠올리면 아련한 감정들이 스쳐 가지요. 이름의 유래에도 여러 설이 있지만 여자 해적 ‘향고(香姑)’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홍콩에서 지난 주말을 보냈습니다. 금융과 미식, 쇼핑의 도시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 시대를 주름잡던 낡은 영화 속 장면들. 아직도 이쑤시개와 맘보춤과 흰 러닝셔츠, 혹은 선글라스와 청재킷과 담배가 먼저 생각납니다. 그 을씨년스럽던 도시 풍경과 통조림들, 자주 흥얼거리게 된 음악까지. 이번 여정에는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커피입니다.차 문화가 발달한 홍콩에 커피를 마시러 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4~5년 전까지는 확실히 홍콩에서 맛있는 커피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차의 도시 홍콩을 커피의 도시로 바꿔가고 있는 건 홍콩 젊은이들. 몇 년 전부터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20~30대 사이에서 번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커피 아카데믹스, 커핑 룸, 싱글오리진 커피 바, 노크박스, 18그램스, 로프텐, 카페 데드엔드 등 홍콩섬과 주룽섬을 오가며 커피투어만 해도 며칠을 보내야 할 정도니까요. 호주의 유명 카페 브루브로스, 뉴질랜드의 퓨얼 에스프레소 등도 라인업에 들어 있습니다.

홍콩 카페들은 각각의 개성과 매력을 드러냅니다. 150년간 영국 식민지를 겪으면서도 그들의 전통과 유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 홍콩인의 힘이 커피에서도 느껴졌습니다. 골목골목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매년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 결승 진출자를 배출하고 있는 커핑룸, 장미향 나는 로즈라테를 내놓는 로프텐, 현지인들의 아지트가 된 데드엔드까지….

만약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더 커피 아카데믹스입니다. 이곳에선 그동안 마신 라테가 라테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굵게 갈린 후추가 아가베 시럽과 조화를 이루는 ‘아가베’, 코코넛과 버터가 풍미를 더하는 ‘자바’, 뉴질랜드 마누카 꿀이 들어간 ‘마누카’, 오키나와산 사탕수수를 더한 ‘오키나와’. 특히 아가베에 있는 후추는 톡톡 터뜨려 씹을 때마다 커피와 아가베 시럽의 향미를 뚫고 나오는 ‘후추의 신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로스팅룸까지 한눈에 보려면 코즈웨이베이 시그니처점을, 낡은 골목 속 조용한 휴식을 원한다면 완차이점을 들러보시길.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