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오페라 '나비부인'의 그곳… 일본 속 작은 유럽 가볼까
입력
수정
지면E6
색다르게 즐기는 일본 여행 (2) 일본 근대화 진원지 나가사키일본 남부 규슈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나가사키는 우리에게 짬뽕과 원자폭탄으로 유명하지만 원래 일본 근대화산업의 시작점이 된 유서 깊은 곳이다. 그 때문에 나가사키는 역사 깊은 성당과 순교지, 서양식 저택과 유적지 등 이국적인 풍경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반도와 수많은 섬 그리고 아름다운 항구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나가사키로 늦가을 여행을 떠나보자.
나가사키=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일본 근대화 이끈 나가사키 개항
나가사키는 일본 근대화 문물을 최초로 받아들인 역사적인 도시다. 나가사키의 개항 역사를 외국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메이지 유신 이후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실상 나가사키항이 개항된 것은 1571년이었다. 나가사키 근대의 풍경을 보려면 구라바엔에 가야 한다. 구라바엔은 글로버 가든의 일본식 표기다. 구라바엔은 근대화에 문을 연 나가사키에 정착한 서양인 거류지 사람들의 저택을 옮겨온 곳이다. 원래 구라바엔은 나가사키 시내에 있었지만 글로버, 링거, 오르트 주택 등의 서양식 건축물과 아름다운 정원을 나가사키항이 한눈에 보이는 미나미야마테 언덕으로 옮기며 관광지화됐다.구라바엔은 두 개의 게이트가 있다. 어느 곳으로 들어가도 결국 한 곳으로 나오기 때문에 관람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지만 대개 관광객은 2게이트인 구 미쓰비시 제2도크하우스부터 본다. 1896년 미쓰비시 중공업의 나가사키 조선소에 세워져 있던 서양식 건축물을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당시 수리선 승무원을 위한 숙박시설로 사용된 도크하우스는 글로버 가든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곳 테라스에서 나가사키 항구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도크하우스 안에는 외국 선박의 모형과 당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2게이트 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구 워커 저택이다. 저택 주인인 로버트 워커 선장은 1873년 건너온 영국인으로 일본 해운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워커 저택에서 건너편에는 영국 상인이자 사업가인 프레드릭 링거의 구 링거 저택이 있다. 일본의 중요문화재이기도 한 링거 저택 안에는 100년 된 오르골이 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티브 된 글로버 정원링거 저택에서 나와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1878년 세워진 일본 최초 서양 음식점인 ‘지유테이’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음식점으로 쓰이다가 폐업한 뒤 한동안 검찰관의 관사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찻집이 됐다. 1863년 미나미야마테 언덕에 지어진 ‘구 글로버 저택’은 구라바엔 중심에 있다. 가장 오래된 서양식 목조건축으로 위에서 보면 네잎 클로버 모양이다. 아치형 회랑기둥이 세워진 테라스와 고풍스러운 지붕을 얹은 저택은 동그란 꽃밭과 어우러져 대단히 이국적이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들이 저택의 꽃밭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1859년 스코틀랜드에서 나가사키로 건너온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는 글로버상회를 설립했다. 글로버는 일본 근대화의 막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글로버는 무기와 선박을 일본으로 수입해 팔고 일본의 고급차를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수출한 일종의 중계무역업자였다. 단지 이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다카시마 탄광을 개발해 일본 최초로 석탄 채굴에 증기기관을 도입하고 미쓰비시 조선소를 최초로 설립했다.
일본이 유럽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경제력을 갖추게 해준 인물이다. 일본 젊은이들이 유럽으로 공부하러 갈 때도 아낌없이 지원해줬다고 한다.
글로버의 삶 또한 범상치 않았다. 글로버의 아내 쓰루는 게이샤 출신이었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작곡됐다고 전해진다.구 링거 저택으로 가는 길에 오페라 ‘나비부인’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한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이 있다. 작곡자 푸치니의 동상도 있다. 전시된 일본 신문에는 도쿄 출생의 성악가인 미우라 다마키가 1915년부터 20여 년간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2000회에 걸쳐 ‘나비부인’을 공연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지키며 순정을 바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이 푸치니의 애절하면서도 감미로운 선율로 그려진다. 그 선율을 음미하며 내려다 본 바다에는 거대하고 평온한 크루즈가 유유히 지나간다.
사연 많은 일본 26성인 순교지
나가사키는 가톨릭 역사의 중요한 기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교령을 내렸지만 신앙의 물결은 잔잔히 퍼져나갔다.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고, 교토와 오사카에서 24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신자가 체포됐다. 나가사키까지 끌려가는 순례의 길을 걷는 도중 2명이 더 체포돼 모두 26명이 1597년 2월5일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했다.니시자카 순교지에 오르면 십자 문양의 벽에 부조로 조각한 26성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조의 26성인 조각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몸집이 작은 어린 순교자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12~14세의 소년들이다. 가장 어린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라키에게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나에게 십자가를 달라’며 순교했다. 26명의 수만큼 가로로 길어진 십자가에서 엄숙함이 느껴진다. 이 기념비 뒤에는 26성인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26성인의 자료와 가톨릭 금지령에 관련된 자료, 순교자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특히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동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을 보면 일본에서 박해받은 가톨릭 신자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든다. 나가사키는 작은 로마로 불릴 만큼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가톨릭 신자에 대한 혹독한 탄압은 개항되기까지 250여 년간 지속됐다. 신자들은 불교도로 가장해 비밀스러운 신앙생활을 지속했는데, 그들을 ‘기리시탄’이라 한다. 몰래 천주교를 믿는 기리시탄의 집에서 발견한 반가사유상은 예수를 상징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리시탄에게 예수를 대신한 동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박해의 절망 속에서 품고 있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1853년 개항 이후 나가사키 항구를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다시 들어왔다. 1862년 로마가톨릭은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한 26인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프랑스 선교사 프티장 신부는 일본 최초의 가톨릭 순교지인 니시자카에 성당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거류지 내 외국인들에게만 종교 활동이 허락됐기 때문에 1864년 니시자카가 잘 보이는 오우라 마을에 성당을 세웠다.
원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평화공원
나가사키를 성지로 떠올리는 이유는 가톨릭이 박해를 받은 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이다. 오우라 천주당은 원자폭탄의 투하로
훼손됐으나 반전(反戰)과 평화의 상징물로 복원하지 않고 있다. 모진 역사 속을 꿋꿋이 버텨온 성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성당이다. 하얀 외관은 빛이 바랬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소박하면서 경건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오우라 성당에는 관광객과 천주교 신자의 순례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1945년 8월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평화공원은 원폭 중심지에 자리한다. 원폭의 참상을 알려 ‘세계 평화를 지키자’라는 의미로 원폭 자료관과 평화공원을 만들었다. 원폭 자료관에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경위,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모습과 피폭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담긴 사진, 핵무기의 사진과 모형,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당시 마쓰야마초 일대에 살고 있던 1700여 명의 사람들은 방공호에 있던 9세 소녀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나가사키 인구 24만 명 중 15만 명 이상이 사망했거나 부상당했다. 한국인도 1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참혹한 전쟁의 기록은 자료관을 돌아보는 내내 말을 잃게 한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원폭낙하 중심지비를 볼 수 있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네모난 비석은 원자폭탄이 터진 상공, 약 500m 지점을 향해 서 있다.
공원 북쪽에는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나가사키 평화 기념상이 있다. 이 지역 출신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가 5년에 걸쳐 완성한 청동상이다. 하늘로 들어 올린 오른손은 전쟁의 위협을, 가로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의미한다. 청동상의 감긴 눈은 원폭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의 흔적’ 군함도
나가사키 항에서 18㎞ 떨어진 하시마 섬은 섬 자체가 작고, 섬 위의 건물이 군함의 모습을 연상케해 군함도(軍艦島)라 불린다. 군함도는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작은 섬이지만 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했다. 석유가 수입되면서 석탄의 사용량이 줄어 1974년 1월15일 폐광됐다. 폐광 이후 주민들이 떠나 지금은 무인도가 됐다. 수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폐허가 된 섬은 황량하다. 건물이 노후하고 폐허가 된 곳이 많아 나가사키시에서 정비한 시설 외에 섬 전체를 돌아볼 수 없다. 군함도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섬은 근대화의 유산이라고 보기에 뼈아픈 곳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던 중 젊은 일본인들이 징집돼 광부가 될 사람들이 부족해지자 조선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이 군함도로 끌려왔다. 그중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 하시마 탄광에서 1295명이 숨졌는데, 조선인이 122명이었다. 당시 조선인은 섬으로 들어가는 길을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이라고 불렀다.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은 해저 1000m 지하에서 석탄 채굴 작업을 했다.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 집에 살게 하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살게 하기도 했다.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이 여러 명 있었으나 파도에 휩쓸리거나 발각돼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화의 표상이라 하기에 여전히 논란이 많은 군함도는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여행메모
370년된 석조다리 거닐고… 나가사키 짬뽕 드셔보세요
일본서 가장 오래된 석조다리 메가네바시
메가네바시는 나카시마가와(中島川)를 가로지르는 다리다. 1634년 고후쿠지의 승려 모쿠스 뇨조가 세운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아치형 석조다리다. 두 개의 아치 모양이 물에 비치면 동그란 원을 그린다. 그 모습이 마치 안경 같다고 해서 메가네바시(안경다리)라고 한다. 1962년 나가사키 대홍수 때 일부가 무너졌다 복원됐다. 돌다리 주변을 걸으며 차곡차곡 쌓인 돌에서 하트 모양의 돌을 찾는 것도 재미있다.
네덜란드 옮겨 놓은 하우스텐보스
하우스텐보스는 나가사키 오무라 만에서 가까운 사세보 지역에 조성된 대형 테마파크다. 나가사키에서 하우스텐보스까지 버스나 열차로 1시간3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네덜란드어로 ‘숲 속의 집’이라는 뜻으로 1992년 3월 문을 열었다. 네덜란드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곳으로 유럽에 온 것 같은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운하 밑으로 흐르는 바닷물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일본과 중국이 합쳐진 나가사키 짬뽕나가사키를 대표하는 음식인 나가사키 짬뽕은 진한 육수에 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넣어 끓인 면 요리다. 1899년 중국 푸젠성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이주한 천핑순이 개업한 중화요리집 시카이로(四海樓)에서 처음 만들었다. 화교나 중국 유학생에게 제공할 저렴하면서도 푸짐한 요리를 고민하다가 쉽게 구할 수 있는 해산물을 넣어 짬뽕을 만들었다.
우동과 라멘의 중간 정도 굵기의 면은 쫄깃하다. 나가사키 짬뽕은 일본과 중국의 식문화가 합쳐져 탄생된 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