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끗 차이] "비싸도 산다"…가성비 시대, 역행하는 가전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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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가전시장, 올들어 급성장요즘은 그야말로 가성비의 시대다. '가격 대비 성능'이 얼마나 되느냐가 소비자 선택의 기준이다. 평창 롱패딩을 사기 위해 밤을 새고 싸고 맛있는 가게 앞에서 줄을 서는 풍경을 보면서 이해가 가는 이유도 '가성비 시대'기 때문이다.
최신 기술에 성능 좋으면 '가격 감수'
하지만 가전제품 시장만은 예외다. 비싸고 새로운 제품들이 잘 팔리고 있다. 냉장고, 세탁기, TV와 같이 고가의 제품들이 아니다. 매일매일 쓰는 생활가전을 중심으로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들어 '가전시장은 저성장'이라는 굴레를 끊어낸 데에는 이러한 고가제품의 활약이 컸다.국내 가전시장은 3분기에도 올해 상승세를 이어갔다. 시장조사기관인 GFK에 따르면 3분기 국내 소비자 가전시장이 전년 동기 대비 3.9%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생활가전 품목에서는 7.6% 상승했다.
생활가전 시장의 성장은 프리미엄 가전 제품이 확대되면서다. 최근 프리미엄 제품들이 다른 제품과 차별화된 ‘혁신기술’을 강조하면서 소비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100만원 청소기 '다이슨', 청소기 시장을 늘리다프리미엄 가전에 불을 붙인 건 작년부터 시작된 '다이슨 열풍'이다. '100만원이 넘는 청소기를 누가 사겠어?'라는 편견을 깨고 다이슨 'V8' 제품은 날개 돋친듯이 팔렸다. 해외 직접구매를 통해 들여온 다이슨 제품은 국내 대리점이 들어서면서 열풍을 이끌었다. 무선청소기임에도 강력한 흡입력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다이슨이 청소기에서 강조하는 핵심 기술은 이중 래디얼 싸이클론 기술이다. 포스트 모터 필터 시스템 재설계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까지도 잡아내면서 더 깨끗한 공기를 밖으로 배출하게 했다. 배터리에 알루미늄을 추가, 더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면서도 사용 시간은 줄어들지 않도록 배려했다. 최근 다이슨은 성능을 약 30% 향상시켰음에도 제품 무게, 배터리 지속을 유지한 V8 카본 파이버'를 선보였다.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인 이 제품 역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올해 다이슨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시장 안팎에서는 '고가의 무선청소기 시장은 포화 아니냐'라며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업체들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LG전자의 'A9'은 출시 4개월 만에 10만대가 팔렸다. 한 대당 100만원으로 단순 계산해도 1000억원에 달하는 매출이다.
가장 마지막 주자였던 삼성전자의 '파워건' 역시 우려를 씻고 판매호조를 보였다. 파워건은 지난 9월 국내 출시 이후, 삼성전자의 스틱 청소기 판매실적은 전년동기대비 5배 이상 상승했다. 특이한 점은 고가제품이 더 잘 팔린다는 것. 파워건 라인업은 10개 모델로 출고가가 80만~120만원대다. 이 중 100만원대 제품이 전체 판매량의 70% 이상이다.
◆400만원대 다리미· 300만원대 김치냉장고·100만원대 공청기 '잘 팔린다'다리미의 가격이 400만원대라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지난 8월 119만원에서 449만원에 이르는 스위스 프리미엄 스팀다리미 브랜드‘로라스타’가 국내에 진출했을 때 얘기다. 믿기지 않는 가격에도 홈쇼핑 방송과 백화점 론칭을 통해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 '리프트 플러스'(139만원) 그나마 저렴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끌면서 품절됐다. 현재는 예약 판매만 받고 있다. 본격 판매되기 시작한 9월부터 누적판매량이 600대에 달한다. 이는 올해 목표 판매량(350대)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회사 관계자는 "예상보다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며 "내년 판매량 목표를 3000대로 잡았다"고 말했다.
로라스타는 그동안 전문가들만 사용했던 수준의 스팀다리미다. 다림질 초보자도 전문가 수준 못지않게 쉽게 다릴 수 있고 모든 소재의 의류를 집에서 관리할 수 있는게 특징이다. 이는 '액티브보드'라는 기술 때문이다. 다리미 판에 블로워와 진공 시스템을 장착해 옷의 주름을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블로워 기능은 차가운 바람으로 다림질한 옷을 건조해주는 역할로 다림질 후에도 눅눅함 없는 옷 상태를 유지해준다.삼성전자가 내놓은 김치냉장고인 '김치플러스'도 바람몰이중이다. 용량은 584L, 486L 두 가지 뿐이고 출고가는 249만~599만원이다. 사양에 따라서지만, 보통 300만원대다. 어지간한 냉장고 뺨치는 가격이지만 잘 팔린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10~11월 김치냉장고 판매량 중 김치플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육박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김치플러스는 '보관의 끝판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식재료를 오랜시간 변치않게 지켜준다. 이는 풀 메탈쿨링으로 ±0.3℃ 이내에서 온도를 유지하는 '정온 유지 성능' 덕분이다. 감자나 바나나와 같은 뿌리 채소, 열대과일 등까지 최대 3주동안 최적 상태로 보관할 수 있다.
공기청정기와 에어서큘레이터(공기순환기)가 결합된 형태인 LG전자의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도 고가에도 불구하고 인기다. 보통 공기청정기가 50만원 이내인데다 한 달에 몇만원만 내는 렌탈제품도 있다.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는 가격이 출하가 기준 75만~122만원으로 고가지만, LG전자가 올해 국내시장에 판매한 공기청정기 가운데 판매량 기준 70%에 육박한다.
이러한 가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술은 공기청정기 상단에 있는 ‘클린부스터’다. ‘클린부스터’ 는 제품 상단 토출구 위에서 바람을 발생시키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깨끗한 공기를 멀리 떨어진 공간까지 빠른 속도로 내보낸다. 클린부스터를 탑재한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는 그렇지 않은 제품에 비해 같은 시간 71% 더 많은 미세먼지를 제거한다. 제거 속도는 24% 더 빠르다.
LG전자 관계자는 "많은 소비자들이 공기청정기를 이곳 저곳으로 이동시키고 방향을 틀어가며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해 기술을 개발했다"며 "360도 전 방향으로 공기를 흡입하고 깨끗한 공기를 배출시키고, 에어 서큘레이터 기능을 합쳐 더 멀리 공기를 순환시키는 제품이다"라고 말했다.
개발과정에서 애로사항은 있었다. 2단인 원통형 본체 2개와 클린부스터까지 총 세 곳에서 발생하는 바람을 소음 없이 조율하는 게 가장 큰 난제였다. 하지만 에어컨 사업을 하며 수십 년간 쌓아온 기류 조절 기술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업계 관계자는 "가전제품은 오래 쓸 수 있다는 인식과 생활 방식이 변한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다"며 "누구에게 '보여주기식' 보다는 '나만의 삶'이나 '만족'을 중요시 여기면서 집안에서만 쓰는 제품에 투자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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