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007작전 방불케 한 '중성자별 충돌쇼' 포착… 올해 과학계 최고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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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지 10대 성과 선정지난 8월17일 오후 9시41분께(한국시간) 미국의 중력파검출기인 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라이고)와 유럽의 버고(VIRGO) 검출기에 중력파(GW170817)가 포착됐다. 중력파란 질량을 가진 물체가 힘을 받아 가속도 운동을 할 때 생기는 파동으로 2015년 처음 포착됐다.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합쳐지거나 초신성이 폭발할 때 발생해 새로운 천문 현상을 규명하는 획기적인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올해 노벨물리학상도 블랙홀이 충돌할 때 발생한 중력파 검출에 기여한 물리학자 세 사람이 받았다. 이날 검출된 중력파는 블랙홀이 아니라 중성자별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중력파가 블랙홀의 충돌이 아니라 다른 천체에서 검출된 건 처음이다. 이번 검출에는 서울대와 한국천문연구원,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을 비롯한 한국 연구진과 미국항공우주국(NASA), 유럽천문대 등 45개국 연구진 3500여 명이 참여했다. 검출 과정은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라이고와 버고에서 중력파가 100초간 포착되자 세계 곳곳에 설치된 전파·광학망원경을 비롯해 NASA 페르미 감마선 위성과 X선 위성 등 70개가 넘는 관측장비가 추적에 나섰다. 페르미 위성은 중력파 검출이 끝나고 2초 뒤 약 2초간 감마선 폭발 현상을 포착했다. 칠레 천문대들은 약 11시간 뒤 약 1억3000만 광년 떨어진 은하(NGC 4993)에서 중성자별의 충돌 현상을 포착했다. 임명신 초기우주천체연구단장(서울대 교수)이 이끄는 연구진도 한국천문연구원의 외계행성탐색시스템(KMTnet) 망원경과 호주에 설치한 이상각 망원경을 이용해 중력파가 발생한 지 21시간 뒤부터 광학 관측을 시작했다.
하나의 천체 현상을 중력파와 감마선, X선, 가시광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동시에 관측한 건 사상 처음이다. 본격적인 다중신호 천문학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세계 수천 명의 과학자에게 포착된 중성자별 충돌 과정을 올해 가장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로 뽑았다. 사이언스는 중성자별 충돌을 포함해 올해 가장 혁신적인 성과 10가지를 발표했다.
유전자 치료 희망 연 3세 미국 소녀희귀 유전병인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를 유전자 치료로 낫게 한 사례는 10대 성과 가운데서도 대중이 뽑은 가장 대표적인 과학 성과에 올랐다. 이 유전병은 몸 전체의 근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질병이다. 신생아 1만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이 유전병을 앓는다. 유아 시절 발명하는 타입1형은 숨을 쉬는 게 어려워 보통 2세 이전에 숨진다. 이 유전병을 앓던 미국의 3세 소녀 에블린 빌러리얼을 비롯해 15명의 아이는 정맥 주사를 통해 유전자를 끼워 넣는 아데노 관련 바이러스(AAV9) 유전자 치료를 받았고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겼다.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가 개발한 소형중성미자 탐지기인 ‘파쇄중성자원’은 대중이 뽑은 두 번째 주요 성과에 올랐다. 국제 공동 연구진은 높이 60㎝, 무게 14.6㎏에 불과한 이 작은 탐지기로 ‘유령입자’로 불리는 중성미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까지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데는 대규모 설비가 사용됐다. 일본 폐광산 지하 1000m 지점에 설치된 슈퍼 가미오칸데는 높이 41m의 거대한 수조에 순수한 물 5만t이 담겨 있다. 유종희 KAIST 교수를 비롯한 4개국 공동 연구진은 토스터 크기만 한 이 작은 탐지기로 43년간 이론으로만 제시됐던 중성미자의 결맞음 상호작용을 처음 관측했다.
기존 유전자 가위보다 한층 더 정교해진 유전자 편집 기술도 올해 중요한 과학적 성과로 뽑혔다. 데이비드 리우 미국 하버드대 교수 연구진은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태아 시절 헤모글로빈을 만들다가 태어나면서 멈춰버리게 하는 고장난 유전자 염기를 편집하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정확하게 염기 하나만 찾아내 교정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시토신(C)을 티민(T)으로 바꾸고, 아데닌(A)을 구아닌(G)의 대체 염기인 이노신(I)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책의 문장 속 문자나 단어를 골라 바꿔 쓰듯 마치 핀셋처럼 염기 하나만 콕 집어 편집하는 기술이다.신종 오랑우탄 발견도 성과
사이언스는 범용 항암제 탄생 가능성을 예고한 연구도 대중이 뽑은 올해 주요 성과로 꼽혔다고 소개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연구진은 흑색종 치료제로 쓰이는 펨브롤리주맙 면역항암제가 12가지 다른 암에서 53% 이상 치료 효과가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 6월 발표했다. 당초 다국적 제약사 MSD의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는 전이성 흑색종 치료제로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이 면역치료제가 다른 암에도 치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진행성 비소세포폐암, 전이성 두경부암 편평세포암종 치료제, 대장암 치료제 등으로 적응증을 확대하고 있다.
신종 오랑우탄을 발견한 것 역시 중요한 과학적 성과로 뽑혔다. 사람과에 해당하는 오랑우탄은 지금까지 두 종만이 알려져 있었다. 11월 연구진은 인도네시아 바탕토루숲에서 발견된 오랑우탄이 이들 두 종과 유전적으로 분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29년대 수마트라섬에서 두 번째 종인 보노보가 발견된 뒤 88년 만에 대형 유인원 새 종이 발견된 셈이다. 하지만 이 오랑우탄은 800마리만 남아 멸종위기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밖에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호주 그리피스대 연구진이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 화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30만 년 전 화석을 발견한 성과와 빙하에서 270만 년 전 공기를 발견한 연구, 올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분야인 저온현미경, 세계 생명과학자가 다른 연구자들이 볼 수 있도록 오픈 데이터베이스에 논문 초안을 올리는 ‘바이오아카이브’도 올해 괄목할 만한 성과로 뽑혔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