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반일 70년, 이제는 극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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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는 냉혹한 힘의 영역점점 멀어지는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여전히 반성 없는 전범(戰犯)국가인가. 고령화와 ‘잃어버린 20년’으로 쇠락해가는 나라인가. 아니면 경제적으로 필수적이고, 배울 게 많은 나라인가.
역동성 역전, 경제격차 더 커져
'뒤끝작렬' 일본 이길 강국 돼야"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일본과의 다양한 교류채널은 2012년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사실상 두절된 상태다. 대일(對日) 수출비중은 전체의 5%, 투자는 2%에 불과하다. 동아시아 밸류체인에서 양국 연결고리는 중국,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쪼그라들었다. 경제교류가 줄면 관계도 소원해진다.그런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한 민간TF 검증결과 발표로 후폭풍이 거세다. 문재인 대통령은 “위안부 협상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다”고 했다. 반면 아베 일본 총리는 “1㎜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한·일 관계의 앞날을 요약한 듯하다. 성난 네티즌들은 단교(斷交)까지 들먹일 정도다.
이래도 괜찮을까. 물론 불행한 과거사는 뼈에 새겨야 한다. 하지만 북핵과 한반도 주변 4강 외교, 언젠가 다가올 통일을 감안할 때 지금 관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일본과 멀어지면 중국을 움직일 지렛대를 잃게 된다. 일본과 찰떡궁합인 미국과도 서먹해질 것이다. 외교가에선 “미국은 의심하고, 중국은 무시하고, 북한은 협박하는 판에 일본과도 척을 진 총체적 외교난국”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축구 한·일전 때마다 “일본에는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축구나 가위바위보를 이긴들 나라 살림이 피는 것은 아니다. 작은 만족감에 도취해 정작 이겨야 할 승부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자. 일본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다. 국제신용등급이 1~2단계 높다고 해서 한국의 위기 가능성을 일본보다 낮게 보는 해외 투자자는 없다.우리가 일본을 앞선다고 자신할 게 있나. 경제 격차는 더 벌어지고 사회 역동성마저 역전돼 버렸다. 반도체 스마트폰을 꼽지만 이마저도 일본산 핵심 장비·부품 없이는 안 돌아간다. 한국은 청년 취업절벽인데 일본은 일자리가 남아돈다. 4차 산업혁명 대처(일본 12위, 한국 25위)도 한참 뒤졌다. 10대 국가전략기술은 일본이 2.8년 앞서 있다. 한·일 노벨 과학상 수상자 ‘0 대 21’이 현실을 대변한다.
배울 것이 있는 상대에게 머리 숙이는 나라가 일본이다. 아베 총리는 2007년 1차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백팩을 메고 청와대로 MB를 찾아와 한 수 배워갔다고 한다. 그는 친(親)기업 ‘아베노믹스’로 5년째 집권 중이다. 해외 관광지에서 음식이 맛있을 때 한국인은 감탄하고, 일본인은 연구한다는 얘기도 있다. 당장 세계 각국이 한국과 일본을 놓고 인기투표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국제관계는 냉혹한 힘의 영역이다. 힘이 없으면 당한다. 외환위기 때 가장 먼저 돈을 뺀 게 일본이고, 통화스와프를 앞장서 해지한 것도 일본이다. 그 이면에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버르장머리’ 발언과 MB의 ‘일왕’ 발언이 있었다. ‘뒤끝작렬’하는 일본에 감정만 앞세웠다간 언제 또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그런 점에서 정부와 청와대는 냉정해야 할 텐데,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부동의의 동의(agree to disagree)’조차 어려운 문제가 돼버렸다. 더구나 비공개 외교문서 공개에 따른 대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 신뢰의 문제다. “한국인은 합의를 해놓고도 협상 여지가 남아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 영국 언론인 마이클 브린의 관찰(《한국인을 말한다》, 1999)이었다.
70년간 반일(反日)에 몰입했다. 임시정부까지 100년이다. 하지만 진정 일본을 이기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반공이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듯이, 반일이 국민정신일 수는 없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일본을 정신·문화·경제 등 모든 면에서 앞서는 ‘극일(克日)’의 결기를 다져야 할 때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