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부와 '행복 엔도르핀'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중세 유대교 연구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스페인 출신 모세스 마이모니데스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자선 기부 등급을 8단계로 나눴다.

가장 낮은 단계는 ‘불쌍해서 주는 것’이다. 바로 윗단계는 ‘마지못해 주는 것’이다. 가장 높은 단계는 ‘받는 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기부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정체를 모르게 하는 것’이다. 익명성을 중시한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식에게 어려서부터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고전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기적 존재로 본다. 그러나 인간에겐 이기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인간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보면 즐거워지고, 고통을 보면 고통스러워진다. 동정(同情)적 행위는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커 켈트너 미국 UC버클리 심리학과 교수는 《선(善)의 탄생》이란 책에서 “돈을 기부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썼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고 주장했다. 실제 미국 오리건대 윌리엄 하보 연구팀 실험결과에 따르면 기부를 하면 인간의 두뇌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거나 즐거운 경험을 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연구팀은 기부를 했을 때 뇌 전두엽의 도파민 등 신경전달 물질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돈을 받을 때 못지않게 행복감을 느낀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름을 알리지 않고 남을 도와줄 때 이런 행복감이 더해진다는 심리학자들의 분석도 있다.올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기부 모금 실적이 저조하다고 한다. 기부 모금 목표액의 1%가 채워지면 1도씩 오르는 ‘사랑의 온도탑’ 수은주는 55.9도(28일 기준)에 머물러 예년 이 시점보다 15도가량 낮다. 기부금을 유용한 이영학 사건 등 여파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익명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어 우리 사회를 훈훈하게 한다. 그제 서울 송파구 롯데백화점 앞에 설치된 한국구세군 자선냄비에 익명의 기부자가 5000만원짜리 수표 세 장을 접어 넣었다. 1억5000만원은 1928년 구세군 자선냄비가 첫선을 보인 이래 한 사람이 기부한 최고액이다.

대구 ‘키다리 아저씨’는 올해도 1억2000만원을 기부, 6년째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울산, 전북 완주, 전남 해남, 경북 경산 등 전국 곳곳에서 ‘얼굴 없는 천사’들이 저금통장, 쌀포대, 라면 박스 등을 어려운 이웃에게 전하고 있다. 이들이 굳이 익명으로 온정을 베푸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뇌 속에 행복의 ‘엔도르핀’이 솟아오르리라는 점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