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호의 데스크 시각] 소확천(小確踐)으로 새해 열자

장규호 문화부장 danielc@hankyung.com
지난해 국내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적폐청산이다. 새 정부 초기 과제였던 것이 어느덧 이 정부와 함께할 국정 철학으로 둔갑해버린 느낌이다. 국민 생활 속에선 아침저녁으로 주고받는 대화의 단골 메뉴가 됐다. 모든 이들이 생활 주변의 크고 작은 문제까지 ‘적폐’라는 딱지를 붙이느라 경쟁했다.

폐단이 쌓이게 된 원인은 그러나 아주 먼 곳에서 찾았다. 효율과 경쟁만 외친 보수정권 10년,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목소리를 경청하기보다 한·일 관계 정상화에만 목을 맨 정부, 블랙리스트를 통해 시도한 문화계 ‘이념 청소’ 등. 적폐의 원인 제공자는 모두 정치 지도자, 관료, 경제계 리더 등 기득권층이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인데, 이 사회 지도층과 전 정부가 나라를 망가뜨렸다는 식이다.理 앞세우는 한국 사회

이런 관점은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의 신작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일부 설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성리학 전통이 뿌리 깊었던 한국은 21세기에도 ‘오직 하나의 완전 무결한 도덕=이(理)’에 높은 가치를 둔다고 오구라 교수는 주장한다. 한국 사람들은 ‘도덕적 완벽’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과 같다고도 했다. 최순실 비선 라인이 국정을 갖고 놀았다는 뜻의 국정농단 프레임이 왜 그토록 심대하게 민심을 뒤흔들었는지 그의 책을 보면 간단 명료하게 이해된다.

문제는 도덕적 완벽에 대한 희구가 사회 지도층에만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 목소리가 하나로 뭉치면서 울림은 더욱 커졌다. 지난해 적폐청산 구호가 우리 사회를 압도한 것도 이런 한국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내안의 적폐' 돌아봐야

올해 2018년 대한민국 사람들은 ‘소확행(小確幸)’을 원한다고 한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을 때’ ‘반듯이 접어 넣은 속옷이 든 수납장을 열 때’ 맛볼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프랑스의 ‘오캄’이니 스웨덴 ‘라곰’, 덴마크의 ‘휘게’ 등도 비슷한 문화 현상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인들은 한편에선 적폐청산이란 거대담론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개인 생활의 영역으로 돌아오면 소확행을 꺼낸다는 점이다. 오구라 교수 주장에 빗대면 ‘정치사회적 문제에선 이(理)에 집착하고 개인사에선 기(氣)를 앞세우는 꼴’이다. 큰 담론으로 공허해진 마음을 손에 잡히는(tangible) 소확행으로 위안삼는 것 같다.

이런 이분법에선 적폐 원인 제공자 그룹에서 자신을 항상 제외한다. 제도를 정비하고, 재난 대비 시스템을 선진화하며, 소관 기관의 책임과 권한(면책 기준 포함)을 명확히 하라고만 한다. 그러면 안전사회가 이룩되고 적폐도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하지만 과연 그럴까. 적폐 과정 어딘가에 일조했을 수 있고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수 있는 내가 제천 화재 참사를 키운 원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소방차 출동을 가로막는 골목길 불법 주차를 나도 버젓이 하고 있지 않은지, 각종 안전 기준을 철저히 지키는지, 빠른 일처리를 위해 탈법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이제 돌아볼 일이다.

적폐의 원인이 내 안에 싹터 있는지, 그것이 한국 사회 문제의 발단이 아닌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小確幸)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실천(小確踐)을 먼저 고민해보는 한 해의 출발이었으면 한다.

장규호 문화부장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