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붓질한 곽덕준 60년 미술의 씨앗

고국 찾은 재일 미술인…갤러리 현대서 1960년대 회화전

일본서 이방인으로 살며 느낀 체험
폐병 걸려 죽을 고비 넘긴 순간
선과 색채로 초현실적 묘사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그린 회화·소묘 50여점 소개
재일 미술인 곽덕준 씨가 갤러리 현대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덫에 걸린 너구리’를 설명하고 있다.
재일(在日) 화가 곽덕준(81)은 어린 시절 ‘조센진’이라 불리며 따돌림을 받았다. 해방되자 일본 국적이 박탈됐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영원한 이방인’이 된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23세에 결핵을 앓고 한쪽 폐를 절제했다. 생사를 넘나들던 6개월간 침대에서 피를 토하고 천장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투병생활을 했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 돌아온 그가 선택한 건 예술이었다. 당시 시대적 배경과 경험은 예술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

지난 10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막을 올린 ‘곽덕준-살을 에는 듯한 시선’전은 한평생 이국 땅에서 죽을 각오로 미술에 몰두한 노화가의 열정을 ‘씨줄’로, 집념을 ‘날줄’로 변주한 자리다. 미술과 동행한 60년 세월이 무르익어 짙은 색채와 선의 아우라로 번지고 있다. 전시장 전관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81년째 ‘타인’으로 살고 있는 작가가 본격적으로 예술가 길을 걷기 시작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제작한 회화와 소묘 작품 50여 점을 채웠다.14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회화 작품들은 젊은 날 격투의 흔적이자 우울함 속에서 끊임없이 내면과 마주해야 했던 어두운 청춘의 상징”이라고 했다. 교토시립 히요시가오카 미술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한 곽덕준은 일본 추상미술 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회화에서 사진, 설치, 비디오까지 폭넓은 작품 활동을 시도해온 작가는 일관되게 사회와 개인의 관계, 현실과 의식, 미디어 이미지와 개인적 사유 간의 거리에 대해 역설적으로 되묻고 있다.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국내에 이름을 알렸고, 201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해 국제 미술계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그의 회화 작품들은 젊은 시절 삶의 궤적을 떠올리게 한다.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 순간에 온몸을 던져 붓을 든 그는 1950년대 후반 일본을 강타한 ‘앵포르멜 열풍’과 1960년대 팝아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본에서 한국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대적 소명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풀어냈다.

즉흥적 선묘와 색채로 사람의 얼굴이나 인체를 만들어 낸 작품들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무의식의 세계를 만화적이고 원시적인 형태로 구현했다. 신체적 트라우마와 태생적 딜레마도 아우렀다. 몇몇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와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구도로 고독감과 강한 생명력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그는 “사람을 작은 우주로 생각하고 제작한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평생의 화업을 ‘정체성의 산물’로 규정하는 그에게 그림은 ‘오늘의 정신성’을 대변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꿈틀거리는 추악한 인간성을 비판하는 노골적인 은유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분노와 야유, 체념에서 우러나오는 무의식 세계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회화가 웃음기 걷어낸 유머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일본 전통 염색기법을 활용한 그만의 매우 독창적인 제작 기법도 눈길을 붙잡는다. 합판 위 석고와 호분으로 두꺼운 층의 요철을 만들어 채색하고, 목공용 본드로 코팅한 후 못으로 무수한 선을 긁어내기를 반복하는 특수한 기법은 태고의 동굴 벽화를 연상시킨다.

고국에 대한 작가의 그리움과 애정도 남달랐다. “아버지는 진주에서 태어나 일본에 정착했습니다. 불편한 정체성과 이를 극복해가며 가끔 진주를 찾았을 때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을 정도로 가슴이 미어져요. 새해 첫 전시를 고국에서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전시는 내달 18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