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황영기 "금융산업, 화장실 갈 때도 허락 필요한 죄수 신세… 20년 뒤도 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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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임 포기하고 퇴임하는 '검투사'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66)이 다음달 3일 퇴임한다. 삼성증권 사장과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 회장 등을 거치며 금융업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그다. 황 회장은 ‘검투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금융투자업계의 이익을 공격적으로 대변해 회원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연임이 확실해 보였지만 자신은 “문재인 정부와 결이 다르다”며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스스로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외교상 기피인물)’라고 했다.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빌딩 집무실에서 만난 황 회장은 ‘정부의 퇴진 압박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현 정부가)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중시하는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아 원활한 업무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 회장은 “한국 금융산업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수준이며 정부의 금융정책 실패가 화근”이라며 정부에 거침없는 쓴소리를 했다.▷금융산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사고치지 말아라' 규제 일변도
금융사 믿고 자율성 주면 금융산업 더 발전할 것
'노후자금' 국민연금으로 코스닥시장 부양하겠다니…
아무리 급해도 안될 말…연금이 시장 개입하면 '위험'
금융지주회장 오래하면 '황제경영' 우려…'3+3년' 적당
“어떻게 한 산업이 20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답보할 수 있는지 안타깝고 부끄럽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산업은 이렇다 할 ‘레거시(유산)’를 남기지 못했어요. 3년 전 금투협회장에 출마한 이유도 이대로는 손주들에게 ‘할아버지가 금융인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겠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큽니다.”
▷우리 금융산업이 정체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요.“정부 탓이 크다고 봅니다. 정부가 금융산업을 키우기는커녕 규제와 관리만 해왔죠. 외환위기 이후 규제는 강경 일변도였습니다. 정부는 ‘금융회사는 사고만 치지 말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어요. 넘어지지 않고서는 자전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제조업은 망하더라도 해외에 진출하게 하고 치열한 경쟁도 붙였지만 금융산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금융규제가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한국 금융산업은 영화 ‘쇼생크 탈출’의 등장인물인 레드(모건 프리먼) 같은 신세라고 보면 됩니다. 장기복역 후 출소한 뒤 마트에 취직한 레드는 죄수 시절의 감시와 통제에 길들여져 화장실에 갈 때마다 상사에게 허락을 맡으려고 하죠. 국내 금융회사들도 오랫동안 규제에 길들여졌어요. 새로운 뭔가를 할 때마다 금융감독당국에 물어봅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회사들조차 당국의 사전 승인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죠. 이런 풍토 속에 어떻게 ‘금융의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변화와 도전이 없다면 앞으로 또 20년이 흘러도 금융산업의 선진화는 불가능합니다.”▷금융회사에 자율성을 더 줘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바람은 다 같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를 믿고 자율성을 줍니다. 아이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때만 개입하죠. 반면 분 단위로 학원 스케줄을 잡고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달달 볶는 부모도 있어요. 지금 한국의 금융산업 규제는 후자와 같습니다. 금융회사에서 전에 없고, 남이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가 금기사항처럼 여겨지는 이유죠.”
▷정부도 그동안 나름대로 규제 완화에 힘쓰지 않았나요.“‘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막강한 거북선이라도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으면 전투를 할 수 없겠죠. 책임 지기 싫어하는 공무원들은 늘 이런 구멍을 만들어 놓습니다. 법과 규정의 미세한 해석상의 차이를 이용해 사업을 무산시키는 사례가 ‘중국발 미세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요. 금융 관료를 확 줄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지금의 3분의 1만 남겨보자는 거죠. 1년 뒤에 금융업계가 잡초만 무성한 불모지로 변할까요. 저는 오히려 금융산업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은행권을 지속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은행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돌파하기에는 조직이 너무 비대합니다. 증권사는 은행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규제를 받고 있죠. 은행업권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론(論)을 꾸준히 제기한 까닭입니다. 은행권의 힘이 더 세기 때문인지 한계가 있더군요. 그래서 자산운용업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산운용업은 투자자와 운용사가 1 대 1로 계약을 맺는 구조여서 정부가 끼어들 여지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자산운용업 성장 가능성이 큰가요.
“국민연금을 비롯해 연금시장 규모가 1000조원 수준으로 커졌습니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인프라도 갖췄죠. 한국형 헤지펀드(사모펀드)가 등장하면서 취임 초 86개였던 운용회사 수가 215개로 늘었어요. 운용업계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겁니다. 앞으로 5~10년간 치열한 경쟁을 거친 뒤 대형화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자산운용업 중심의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검토해볼 만하다고 봐요.”
▷코스닥 활성화를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하자는 얘기도 나옵니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그렇게 쓰겠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놀랍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어요. 일본은 공적연금(GPIF)법에 ‘연금적립금의 운용이 시장 및 기타 민간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유의하라’고 적시하고 있죠. 국민의 노후자금 마련에만 집중하라는 얘기입니다. 정부와 정치권은 GPIF가 보유한 주식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고 모두 자산운용사에 위탁하죠. 우리도 일본 모델로 가야 합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자제해야 한다는 겁니까.
“한국의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할 때 운용사에 일임하거나 위탁하는 방식을 택하죠. 위탁하면 운용사가 의결권을 보유하지만 일임 투자분은 국민연금이 갖습니다. 국민연금이 투자할 때는 모두 위탁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금융지주회사 회장의 연임 문제도 이슈입니다.
“두 차례 금융지주 회장을 지낸 경험에 비춰보면 금융지주 수장의 임기는 ‘3년+3년’으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원들은 조직을 떠나면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인사에 목을 매죠. 장기 집권자가 나오면 인사권이 더 강해져 ‘황제경영’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습니다.”
▷회장 재임 기간에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야성과 상상력이라는 금융투자업의 본질을 환기시켰다는 점입니다.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도입하고 초대형 투자은행(IB)의 첫발을 뗐죠. 그동안 맡은 일 가운데 금투협회장이 가장 보람 있었어요. 퇴임한 뒤에는 금융권에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로펌 등) 다른 조직에 이름만 걸어놓고 돈을 받는 일도 없을 겁니다. 여유가 된다면 후학을 기르고 글을 쓰고 싶습니다.”
● 황영기 회장은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에게는 ‘검투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2001~2004년 삼성증권 사장 시절 “회사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사의 자세로 일하겠다”고 말한 게 인연이 됐다. 당시 삼성증권은 ‘천수답식 영업’으로 불리던 주식위탁매매에서 자산관리 중심으로 영업 기반을 바꿨다.
삼성증권 사장에서 물러나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을 맡을 때는 안에 단검이 들어 있는 지휘봉을 일선 지점장들에게 나눠주며 영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일화와 함께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는 황 회장의 강단 있는 성격이 검투사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황 회장은 1975년 삼성물산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뱅커스트러스트은행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1989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국제금융팀장이 됐다. 1999년에는 삼성투자신탁운용(현 삼성자산운용) 사장으로 선임돼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우리금융지주 회장 시절 LG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을 인수하는 등 비은행 사업부문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8년 KB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했지만 금융위원회가 우리은행장 시절 파생상품 투자로 은행에 1조원의 손실을 끼쳤다는 이유로 직무정지 3개월의 중징계를 내려 1 년여 만에 하차하기도 했다. 그는 “징계가 부당하다”며 법정소송을 벌여 징계취소 판결을 받아냈다.
2015년 금투협회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초대형 투자은행(IB) 육성 방안 마련, 한국형 헤지펀드(사모펀드) 신설, 한국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와 비과세 해외 주식형펀드 도입 등을 이끌었다.△1952년 경북 영덕 △서울고,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원 석사 △삼성물산 △뱅커스트러스트은행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삼성전자 자금팀장 △삼성생명 전략기획실장 △삼성투자신탁운용 사장 △삼성증권 사장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KB금융지주 회장 △제3대 금융투자협회장 △다산금융상 대상·공로상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