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무인(武人)군주'… 조선 최강 군대 키우다

책마을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김준혁 지음 / 더봄 / 368쪽 / 1만8000원
무예도보통지 ‘마상기창’. /더봄 제공
지난해 3월 수원화성박물관이 유물 구입을 추진할 때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깜짝 놀랐다. 1598년 훈련도감의 장교였던 한교가 쓴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武藝諸譜)》 의 소장자가 유물 매도 신청을 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예제보》 원본은 프랑스 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있고, 국내에는 프랑스가 기증한 마이크로필름만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거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파리의 무예제보는 조선 후기 숙종 연간에 재간행된 것인 데 비해 수원화성박물관이 소장한 것은 420년 전에 간행된 초간본이라는 점이었다.

조선 정조와 수원화성 전문가인 김 교수가 무예제보에 주목한 것은 이 책이 정조 때 간행된 종합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원류여서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으려던 효종의 북벌계획에 공감한 사도세자는 무예제보를 기반으로 12기(技)를 더해 18기를 정리한 《무예신보》를 1759년에 편찬했다.

이로부터 31년 뒤 정조가 마상(馬上) 기예 6기를 추가해 24기의 무예로 완성한 것이 지난해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무예도보통지》다. 북한이 단독으로 신청해 등재된 점이 아쉽긴 하지만 이는 조선의 무예와 군사기록을 담은 이 책의 독창성을 세계가 인정한 쾌거다.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은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가 문치(文治)에 힘쓴 ‘학자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무(武)의 강화를 통해 자주국방을 지향했던 ‘무인(武人)군주’였음을 강조한다. 정조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친위부대 장용영(壯勇營)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저자는 “정조는 문과 무를 병행 발전시키기 위해 문치규장(文治奎章)과 무설장용(武設壯勇)을 내세우며 규장각과 장용영을 설치했다”며 “무의 발전을 통한 국방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장용영을 선택했다”고 설명한다.즉위 후 정조는 군제개혁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조선 후기 중앙군사제도의 핵심은 수도 방어를 맡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과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총융청, 수어청 등 오군영이었다. 하지만 10만여 명에 달했던 오군영의 훈련성과와 효용은 높지 않은 반면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더욱이 노론이 오군영을 장악한 탓에 왕권을 위협했고, 역모사건도 잇달았다. 정조가 성호 이익의 친위군병 양성론을 받아들여 새로운 호위기구로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조는 장용영을 통해 친위군 강화는 물론 균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 안정,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까지 도모했다.

각종 병서도 잇달아 편찬했다. 1789년에는 장용영에 지시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게 했고, 북학파인 이덕무·박제가와 당대 최고의 무사였던 백동수에게 실무를 맡겼다. 정조는 이 무예서를 통해 장용영 군사들을 강군으로 육성, 기존의 중앙오군영이 넘볼 수 없는 막강한 군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을 곁들여 각종 무기의 사용법과 자세 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시연한 사람이 조선 최고의 무사, 조선 최고의 협객으로 불렸던 백동수였다. 정조는 1788년 백동수를 장용영 초관에 임명해 군사들이 익히는 24가지 무예를 표준화하고 정리하도록 했다. 정조는 책의 이름을 직접 짓고 장용영에 임시 출판국을 설치해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여기서 합숙하며 편찬에 전념토록 했다.장용영은 한양을 중심으로 5개 부대로 나눠 경기도 주요 도시에 배치됐다. 처음에는 소규모 부대였지만 1793년 내외영제를 실시하면서 인원이 대폭 늘어나 5200여 명에 달했다. 부대 위상과 장병들에 대한 처우도 기존 군영보다 훨씬 나았다. 반면 엄격한 군령과 훈련을 견뎌야 했다. 정조는 무예도보통지 서문에서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썼다.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뜻이다. 장용영은 매달 한 차례 진법을 익히고, 3일마다 대(隊) 단위로 돌아가며 활쏘기, 조총 사격, 창검무예 시험을 봤다.

1795년 화성행궁에서 열린 정조의 대규모 화성행차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은 사도세자로부터 시작해 정조가 준비해온 군사력을 시험하고 과시하는 자리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수원에 뒀던 장용영 외영 군사들의 일사불란한 군사훈련과 화약 신무기 실험이 주목적이었다는 것. 정조는 다른 능행 행차 때도 군사훈련을 겸했다. 강군 양성의 목표는 정조의 급서와 함께 무산됐지만 무예도보통지와 장용영에 담긴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