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한국과학사 연구 한 길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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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사 연구의 선구자이자 과학 문화재 발굴 산증인인 원로과학사학자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사진)이 15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86세.
고인은 60년 한 평생을 역사 속으로 잊혀지던 과학 문화재 연구에 매진했다. 오랜 세월 잊혀진채 창경궁 명정전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시대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를 비롯해 조선시대 물시계인 ‘자격루(국보 229호)’, 17세기 과학자이자 천문학자이던 송이영이 천문관측 기기인 혼천의와 서양식 자명종 원리를 이용해 만든 천문시계인 ‘혼천시계(국보 230호)’ 등 국보와 보물이 된 과학문화재 30점을 발굴했다.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북쪽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고인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성신여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한국과학사학회장과 성신학원 이사장, 국사편찬위원, 문화재 위원 등을 지냈다. 고인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을 지냈고 외솔상, 국민훈장 동백장, 세종문화상,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등을 받았다.
고인은 “과학사 통사 연구는 긴 나그넷길과 같다”며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에 초석을 놨다. 1950년대 중반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 케임브리지대 교수 주도로 중국 과학사에 대한 재인식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자극을 받은 고인은 한국 과학사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1966년 발간된 《한국과학기술사》는 무려 7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다. 고인은 과학기술적인 시각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했던 ‘자기비하’적 선입견은 물론 ‘한국 것이 무조건 세계 최고’라는 국수주의 시각도 모두 배격했다. 오롯이 철저한 분석에 입각했다. 고인은 평소 “우리 민족의 과학적 성과에 대해 자세한 설명 없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에 통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신동원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장이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고인은 10년마다 개정판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1976년 첫 개정판을 냈지만 지병과 성신여대 총장, 이사장을 잇따라 맡으면서 이후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2000년 《한국과학사》를, 2012년에는 영문판을 낸데 이어 작고하기 2년전인 2016년 《우리 과학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를 내며 마지막 혼을 불태웠다. 마지막 책은 과학사가로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과학과 기술, 해당 시대의 과학 문화재를 통사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고인의 표현처럼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조사하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자료를 찾아 고증하는 작업을 이어 오며 얻은 이삭들”을 정리한 것이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고인은 60년 한 평생을 역사 속으로 잊혀지던 과학 문화재 연구에 매진했다. 오랜 세월 잊혀진채 창경궁 명정전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시대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를 비롯해 조선시대 물시계인 ‘자격루(국보 229호)’, 17세기 과학자이자 천문학자이던 송이영이 천문관측 기기인 혼천의와 서양식 자명종 원리를 이용해 만든 천문시계인 ‘혼천시계(국보 230호)’ 등 국보와 보물이 된 과학문화재 30점을 발굴했다.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북쪽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고인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성신여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한국과학사학회장과 성신학원 이사장, 국사편찬위원, 문화재 위원 등을 지냈다. 고인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을 지냈고 외솔상, 국민훈장 동백장, 세종문화상,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등을 받았다.
고인은 “과학사 통사 연구는 긴 나그넷길과 같다”며 한국 과학기술사 연구에 초석을 놨다. 1950년대 중반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 케임브리지대 교수 주도로 중국 과학사에 대한 재인식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자극을 받은 고인은 한국 과학사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1966년 발간된 《한국과학기술사》는 무려 7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다. 고인은 과학기술적인 시각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했던 ‘자기비하’적 선입견은 물론 ‘한국 것이 무조건 세계 최고’라는 국수주의 시각도 모두 배격했다. 오롯이 철저한 분석에 입각했다. 고인은 평소 “우리 민족의 과학적 성과에 대해 자세한 설명 없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에 통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신동원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장이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고인은 10년마다 개정판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1976년 첫 개정판을 냈지만 지병과 성신여대 총장, 이사장을 잇따라 맡으면서 이후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2000년 《한국과학사》를, 2012년에는 영문판을 낸데 이어 작고하기 2년전인 2016년 《우리 과학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를 내며 마지막 혼을 불태웠다. 마지막 책은 과학사가로서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과학과 기술, 해당 시대의 과학 문화재를 통사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고인의 표현처럼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조사하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자료를 찾아 고증하는 작업을 이어 오며 얻은 이삭들”을 정리한 것이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