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흔든 판결들] "한정승인자의 담보권이 우선"… 망자의 채권자 보호책 미흡

한정승인과 채권 순위 (대법원 2010년 3월18일 선고 2007다77781 전원합의체 판결)

양소라 <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양 소 라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상속이 개시되면 상속인은 상속 개시 당시부터 피상속인의 재산에 관한 포괄적인 권리, 의무를 승계하게 된다(민법 제1005조). 그러나 피상속인이 채무 초과 상태인 경우까지 상속인의 잘못 없이 피상속인의 채무를 당연히 상속받는 것은 부당하다. 이에 민법은 상속 포기 및 한정승인 제도를 통해 상속인의 의사에 따라 상속을 거절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있다.

상속인이 한정승인을 하면 피상속인 채무에 대한 상속인의 책임은 상속재산으로 한정된다. 한정승인자는 상속재산으로만 상속채무를 변제하면 되고, 채무를 변제하고 남은 상속재산은 한정승인자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상속채권자는 상속재산에만 강제집행을 할 수 있고 한정승인자의 고유 재산에는 강제집행을 할 수 없다.그러면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는 한정승인자가 상속받은 상속재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 있을까.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는 상속채권자가 상속재산으로 그 채권을 변제받지 못한 상태에서 상속재산을 고유채권에 대한 책임재산으로 삼아 강제집행을 할 수는 없다(대법원 2016년 5월24일 선고 2015다250574 판결). 그러나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가 단순한 일반채권자가 아니라 한정승인자로부터 상속재산에 관한 저당권 등 담보권을 취득해 우선변제권을 갖고 있는 경우는 어떨까. 이는 상속재산의 한정승인 사실을 모르고 상속재산에 관해 근저당권 등 담보권을 취득한 자와 상속채권자 중 누구를 보호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대법원 2010년 3월18일 선고 2007다77781 전원합의체 판결’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상속채권자 vs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

위 판결의 사실관계를 보자. 망자 A는 원고에게 5억원 상당의 대여금 채무를 지고 있었고, A의 부인인 B는 피고에게 1억원 상당의 대여금 채무를 지고 있었다. A는 2002년 11월 사망했고, 그 상속인으로는 처 B와 딸 두 명이 있었는데 딸들은 상속을 포기하고 아내 B만 한정승인을 했다. 아내 B는 한정승인 후인 2003년 5월 A의 부동산에 관해 상속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이후 B는 자신이 상속받은 부동산에 관해 2003년 7월 B의 대여금 채권자인 피고에게 채권최고액 1000만원으로 하는 근저당권을 설정해줬다.

A의 대여금 채권자인 원고는 A 사망 후인 2004년 4월 한정승인자 B를 상대로 “B는 원고에게 5억원 및 지연손해금을 A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의 한도 내에서 지급하라”는 내용의 판결을 선고받고, 한정상속 부동산에 관해 강제경매 신청을 했다. 이 강제경매 절차에서 경매법원은 부동산의 근저당권자인 피고에게 채권최고액 1000만원을 우선 배당하고, 나머지 금액만 원고를 포함한 일반채권자에게 안분해 배당하라는 취지의 배당표를 작성했다.

원고는 배당기일에 피고의 배당액 전부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는 배당이의 소송을 제기했다. 상속인이 한정승인을 한 이상 상속재산은 상속채무 변제에 먼저 사용돼야 하며, 상속인의 고유채권자인 피고는 상속재산인 이 사건 각 부동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 없으므로 경매절차에서 피고가 배당받은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였다.▶엇갈린 1심과 2심

1심은 한정승인자인 B에게서 상속재산에 관해 근저당권을 취득한 피고가 상속채권자인 원고보다 우선 배당을 받아야 한다고 봐 원고 전부 패소 판결을 내렸다. 2심은 1심과 결론을 달리했다. 상속재산과 한정상속인의 고유재산은 법률적으로 별개의 재산을 구성하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한정상속인의 채권자는 상속재산에 대해 집행할 수 없으므로 상속채권자인 원고가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인 피고보다 우선한다고 봤다.

1심과 2심의 결론이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3인 중 9인의 다수 의견에 따라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라고 하더라도 한정승인자로부터 상속재산에 관한 근저당권 등 담보권을 취득한 이상 해당 상속재산에 관해 상속채권자보다 우선변제받을 수 있다”는 취지로 판단해 1심과 결론을 같이했다.▶대법관 다수 의견 “담보권 존중해야”

위 대법원 다수 의견은 ① 민법은 한정승인자의 상속재산 처분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한정승인자가 상속재산에 담보권을 설정하는 것과 같은 처분 행위도 가능하다는 점 ② 민법은 한정승인만으로 상속채권자에게 상속재산에 관해 한정승인자로부터 물권을 취득한 제3자보다 우선적 지위를 부여하는 규정은 두고 있지 않다는 점 ③ 민법 제1045조 이하의 재산분리 제도와 달리 한정승인이 이뤄진 상속재산임을 등기해 제3자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규정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한정승인자로부터 상속재산에 관해 저당권 등의 담보권을 취득한 사람과 상속채권자 사이의 우열관계는 민법상의 일반원칙에 따라 담보권을 취득한 사람을 우선해야 하고, 한정승인만으로 상속채권자가 우선적 지위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법원 다수 의견은 거래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정승인을 통해 부동산을 상속받았더라도 부동산 등기부등본에는 한정승인자가 상속을 원인으로 해 이전등기한 것으로만 나올 뿐 한정승인을 했다는 사실은 기재되지 않는다. 즉 한정승인 사실은 공시되지 않기 때문에 제3자가 이를 알기란 어렵다. 따라서 한정승인자가 상속받아 부동산 소유권이전등기를 완료한 뒤 그 부동산에 관해 자신의 채권자에게 근저당권을 설정해줬다면 그 채권자(근저당권자)로서는 자신이 근저당권자로서 우선변제권을 가지고 있다고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해당 상속재산에 관해 강제집행 절차가 개시됐는데 나중에 비로소 한정승인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상속채권자보다 후순위로 배당받으면 한정승인자의 근저당권자는 예상치 못한 손해를 입는다.

대법원 다수 의견은 등기부등본 등에 한정승인 여부가 공시되지 않는 현행 법률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거래 안전을 고려해 한정승인자로부터 상속재산에 관해 저당권 등의 담보권을 취득한 사람이 상속채권자보다 우선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편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된 뒤 ‘대법원 2016년 5월24일 선고 2015다250574 판결’에서는 한정승인자의 채권자가 일반채권자인 경우에는 상속채권자가 우선한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담보권 없으면 상속채권자가 우선

위 판결은 상속재산에 관해 상속채권자와 한정승인자로부터 근저당권 등 담보권을 취득한 자 중 누가 우선하는지에 관한 최초의 판결이다. 현행법상 한정승인 사실을 공시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상속재산에 관해 한정승인자로부터 담보권을 취득한 자보다 상속채권자를 우선해 보호하는 것은 거래의 안전을 크게 해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가 일반채권자가 아니라 한정승인자로부터 저당권 등 담보권을 취득한 자인 경우에는 일반 민법의 원칙에 따라 상속채권자보다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가 우선한다는 대법원 결론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한정승인의 경우 상속채권자는 상속인의 고유재산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 없고 상속재산으로만 채권의 만족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한정승인자가 상속재산에 관해 일방적으로 담보권을 설정함으로써 상속채권자는 상속재산마저도 그 담보권자보다 후순위가 되는 손해를 입는다. 상속채권자로서는 형평에 반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한정승인 사실을 사전에 알 수 있도록 한정승인에 관한 공시 방법(한정승인 시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기재)을 도입하고, 그와 같이 등기된 부동산에 대해서는 상속채권자의 상속재산에 관한 우선적 권리를 인정하는 규정을 신설하는 등 한정승인자의 고유채권자와 상속채권자의 우열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해 양 당사자의 이익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 상속개시 3개월 이내 법원에 신고해야 한정승인 효력한정승인이란 상속인이 상속으로 취득한 재산의 한도에서 피상속인의 채무와 유증(遺贈: 유언으로 자기 재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타인에게 주는 행위)을 변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속을 승인하는 것을 말한다. 한정승인은 상속 개시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내에 법원에 한정승인 신고를 하면 된다. 상속 포기란 상속으로 인한 법률상 지위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상속을 포기하면 처음부터 상속인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1순위 상속인들이 상속을 포기하면 피상속인의 채무가 그 다음 순위 상속권자(직계존속, 형제, 자매, 4촌 이내 방계혈족의 순)에게 넘어가 그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고통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1순위 상속인이 상속 포기를 하지 않고 한정승인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양소라 <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