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코노미] 청약의 문,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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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 성공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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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에 다니는 50대 직장인인 나는 청약으로만 서울 강남권 진입에 성공했다. 처음으로 당첨의 기쁨을 누린 건 1997년 외환위기 직전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엔 집값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아파트 청약경쟁이 그리 치열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강남권 진입을 목표로 했다. 꾸준히 강남권에서 신규 분양되는 아파트에 청약했다. 그러던 중 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서울 서초구 잠원동 중앙하이츠 아파트 31평형에 당첨됐다. 분양가는 1억 9000만 원 정도였다. 1991년 결혼 이후 맞벌이를 하면서 종잣돈을 꾸준히 모은 터라 대출을 절반 정도만 끼면 분양대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당첨의 기쁨도 잠시. 대한민국을 초토화한 외환위기가 터졌다. 완공 때까지 2년 동안 마음을 졸였다.분양권 값이 내려가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분양보증 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부도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시공사인 중앙건설의 주가가 액면가의 5분의 1수준(1,000원)으로 급락해 불안감이 더했다. 한 달에 1~2번 정도 현장을 찾아서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다행히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돼 1999년에 입주할 수 있었다.(이후 중앙건설은 부도 처리됐다. 1970년대 ‘트로이카’로 불리며 이름을 날렸던 배우 정윤희 씨 남편이 前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이다.) 입주 후 2년 정도 지나자 집값은 5억 원 수준으로 올라섰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했다. 한번 분양권으로 짭짭한 재미를 본 터라 다시 동시분양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청약 규제를 완전히 풀었다. 이에 힘입어 부동산시장이 상승 전환하면서 청약경쟁률이 높아졌다. 입지에 따라 수십 대 1에서 수백 대 1까지 나왔다. 수십 번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동시분양 때마다 강남권 아파트에 청약했다. “1백 대 1 경쟁률 아파트에 100번 청약하면 한번은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당첨의 기쁨은 3~4년 찾아왔다. 청담동 대우유로카운티 아파트에 당첨했다. 108대 1의 경쟁률을 뚫은 터라 첫 당첨 못지않게 짜릿했다. 이 집은 2016년 10억 원에 팔았다.
꾸준히 청약시장의 문을 두드린 덕에 10년 동안 두 번 당첨돼 강남의 생활 인프라를 누리면서 1억 원 수준이던 원금을 10억 원으로 불렸다. 세금도 전혀 내지 않았다. 철저히 1가구 1주택 비과세 혜택을 받는 쪽을 선택했다. 일시적 2주택자가 되기도 했지만, 기존 집을 3년 안에 팔아 비과세 혜택을 받았다.이후 재건축으로 투자 수단을 전환했다. 대세 상승기가 왔을 때 훨씬 수익률이 높은 것을 봤던 데다 대단지 새 아파트에 살고 싶어서였다. 기존에 당첨됐던 집들은 모두 200가구 규모 작은 단지였다. 청약에서 재건축으로 방향을 틀기 전엔 공부를 충분히 했다. 부동산카페에서 여러 해에 걸쳐 고수들과 친분을 쌓고, 부동산시장 흐름 읽는 법을 배웠다.
분양권이 좋은 점은 싸게 내집마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설사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분양가를 주변시세보다 낮게 책정한다. 정부가 분양가를 억누르고 있어 당첨만 되면 3~4억원의 웃돈을 기대할 수 있는 곳도 더러 있다. 게다가 집값은 한꺼번에 내지 않는 것도 큰 매력이다. 중도금을 입주할 때까지 여러차례 나눠서 낸다. 총분양가의 40~50%까지 중도금 대출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정리=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