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프리미엄' 악용… 은행 송금 대신 가상화폐로 환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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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외환거래 통로 된 가상화폐가상화폐를 활용한 불법외환거래가 횡행한다는 소문은 작년 하반기부터 끊이지 않았다. 한국 가상화폐 가격에 이른바 ‘김치 프리미엄’이 있는 점을 악용해 일부 투자자가 한국에서 돈을 빼돌려 해외에서 싼 가상화폐를 산 뒤 한국에서 이를 매각해 차익을 보는 ‘원정투기’ 과정에서 외국환거래법 위반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중국 등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에 비트코인을 전송한 후 불법 환치기(무등록 외국환거래) 등을 통해 자금을 회수해간다는 얘기도 많았다. 관세청의 특별단속 결과 이 같은 소문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관세청은 31일 가상화폐 등을 이용한 6375억원 상당의 외환 범죄를 적발하고 환치기와 원정투기 수법 등을 자세하게 공개했다.
관세청, 수천억대 범죄 적발
해외 페이퍼컴퍼니 통해 원정투기
한국보다 싼 가상화폐 구입 뒤
국내 거래소에서 원화로 바꿔
규제 가로막힌 중국 투자자들
한국서 자금회수 가능성 높아
당국, 마약 거래 활용여부도 조사
해외 페이퍼컴퍼니까지 활용일부 투자자는 해외 페이퍼컴퍼니까지 동원해 가상화폐 원정투기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D사는 비트코인을 구매할 목적으로 해외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허위계약서를 만들어 소프트웨어를 산다는 명목으로 2015년 12월부터 작년 12월까지 모두 1647억원을 이 페이퍼컴퍼니 계좌로 불법 송금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송금액의 대부분인 1642억원을 해외 가상화폐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을 매입하는 데 썼다.
D사는 해외에서 산 비트코인을 페이퍼컴퍼니 전자지갑에 전송한 뒤 이를 다시 D사의 국내 전자지갑으로 보냈다. 이어 국내 가상화폐 취급소에서 비트코인을 팔아 원화 계좌로 입금을 받았다. 관세청은 “D사는 불법 송금과 불법 해외예금 보유는 물론이고 해외 페이퍼컴퍼니에 송금한 자금 중 5억원을 비밀계좌로 빼돌려 재산국외도피 혐의도 받고 있다”고 전했다.가상화폐 활용 환치기 속출환치기 수법에도 가상화폐가 동원됐다. 무등록 외환거래업체인 A사는 2013년 11월부터 작년 12월까지 4년여에 걸쳐 일본 현지에서 한국에 송금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엔화를 받아 이를 A사 한국 계좌로 불법 송금하는 방법을 통해 모두 537억원의 환치기를 저질렀다. 이 중 약 18%에 달하는 98억원은 가상화폐를 활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A사는 일본에서 가상화폐를 구매해 한국으로 전송한 뒤 국내 거래소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이를 현금화했다.
B씨도 호주에 송금업체를 설립하고 2013년 3월부터 작년 12월까지 4169억원의 환치기를 했다. B씨는 환치기 과정에서 운영자금이 부족해지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 215억원을 불법 송금했는데, 이 중 3억원은 가상화폐로 했다.
불법 외환거래업체인 C사는 원화로 산 가상화폐를 전자지갑으로 해외 제휴업체에 전송한 뒤 이 업체가 해외 거래소에서 가상화폐를 매각해 17억원을 해외 수령인에게 지급하기도 했다.김용철 관세청 외환조사과장은 “그동안 환치기는 관련 계좌에서 잔액이 부족해지면 불법 휴대반출이나 은행 송금을 통해 이를 메꿨지만 최근 가상화폐를 활용한 송금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며 “수수료를 받지 않고 가상통화 시세차익으로 수수료를 대신하는 신종 수법도 포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마약 거래자금 활용도 수사
관세청은 환전영업자나 가상화폐 구매대행업체 등을 대상으로 불법외환거래와 자금세탁혐의에 대한 조사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김 과장은 “가상화폐를 활용한 환치기 의심 사례를 더 조사하고 있다”며 “3월까지 불법거래업체를 추가로 적발해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세관당국은 특히 가상화폐거래소가 폐쇄된 중국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가상화폐를 현금화하는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겠다는 방침이다. 관세청은 중국 가상화폐가 환치기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현금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서울 대림동 일대 환전상 등을 대상으로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본부세관은 지난 25일 비트코인을 판 돈으로 한국에서 금괴 39개를 구매한 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이를 갖고 나가려던 일본인 두 명을 붙잡아 조사하기도 했다. 인천본부세관은 다만 이들이 금괴를 밀반출할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풀어줬다.
관세청은 밀수담배, 마약 등 불법 물품 거래 과정에서도 가상화폐가 이용됐는지 조사를 확대하기로 했다. 관세청 관계자는 “가상화폐는 거래 내역을 파악하기 힘들어 마약 등 불법 물품 거래 대금을 주고 받을 때 활용할 여지가 충분하다”며 “관련 사례가 있는지 정밀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