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욱의 IB 야사] 메이지유신 때 해외채권 첫 발행… 한국보다 1세기나 앞서 외자 유치

근대일본, 국제자본시장에 가다
한국이 국제 자본시장에 최초로 얼굴을 비친 때는 언제일까? 한국 기관이 해외 채권시장에 나가서 처음 발행한 사모 외국통화 표시 채권은 1974년 산업은행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발행한 7500만디르함 규모의 채권이다. 공모는 2년 뒤인 1976년 역시 산업은행이 쿠웨이트에서 2400만디나르 규모로 발행해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등록시킨 것이 최초다. 유로본드시장에 한국이 처음 진출해 달러화 표시 공모 채권을 발행한 건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절이었다.

이웃나라 일본은 어떨까? 일본의 국제 자본시장 진출은 한국보다 거의 1세기나 앞선다. 일본이 최초로 해외 채권을 발행한 것은 메이지유신(1868년)으로 근대 일본이 시작된 지 2년 뒤인 1870년이었다. 발행지는 런던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 건설의 최우선 과제는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러려면 철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쿄와 오사카 간, 그리고 도쿄와 요코하마 간 근대 철도를 놓기로 하고 건설자금을 대기 위해 국제 자본시장의 문을 두드렸다.당시 이 작업을 진행한 일본 재무성 관료들이 을사늑약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두 사람이다. 1870년 런던 시장에서 판매된 최초의 영국 파운드화 표시 일본 정부 채권은 100만파운드 규모였고 만기는 13년, 금리는 연 9%였다. 상당히 할인된 가격이어서 일본의 채권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기채 물량 4배 규모의 주문이 쏟아진 성공적인 발행이었다.

일본이 이자를 워낙 꼬박꼬박 잘 갚은 결과 1870년 일본 파운드화 국채는 가격이 올라 발행 당시의 디스카운트를 모두 해소했다고 한다. 일본은 2년 뒤 그 여세를 몰아 만기 25년 장기물로 240만파운드를 발행했다. 담보로 일본 정부가 보유한 쌀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신용을 보강해 금리를 연 7%로 낮출 수 있었다.

두 번의 발행 후 일본은 25년 동안 해외 채권을 발행하지 않았다. 1878년부터 일본의 국가재정이 흑자로 돌아서서 오히려 동아시아의 채권국이 됐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다시 본격적으로 국제 자본시장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의 열강으로 부상해 청나라 및 러시아와 대립한 1890년대 중반 이후다. 일본은 10년 간격으로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을 치러야 했다. 자체 보유자금만으로는 어림없는 큰돈이 필요했다.이때 일본 금융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당시 요코하마쇼긴은행의 부총재(부행장) 다카하시 고레기요였다. 요코하마쇼긴은행은 한국의 산업은행 같은 역할을 했던 정책금융기관이었다. 1880년대에 이미 미국 뉴욕과 런던, 중국 상하이에 해외 지점을 개설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육군의 주거래은행이었다는 혐의를 받고 종전 후인 1946년 미쓰비시UFJ은행의 전신인 도쿄은행에 강제 합병당해 사라졌지만….

김지욱 < 신한금융지주 글로벌자본시장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