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사태는 '끝이 아닌 시작'… '묵인된 관행' 반성·청산해야

사진=연합뉴스
연극연출가 이윤택의 성추행 파문을 계기로 연극계의 '묵인된 관행'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하 위계질서가 강한 연극계 특성상 권력과 권위를 이용한 성폭력이 이뤄지기 쉽지만 '관행',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성폭력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알면서도 묵인했던 것이 이윤택 사태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극계 '미투' 봇물 = 14일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가 처음으로 이윤택 연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이후 이 연출은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이 연출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지고 급기야 성폭행 주장까지 터져 나오며 연극계에서는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이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폭로가 확산하고 있다.

이 연출은 자신이 이끌던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에게 수시로 안마를 요구했고 안마가 유사 성행위로 이어지는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이 연출이 연희단거리패 단원 외에 작품을 함께 했던 외부 배우들에게도 발성을 지도해준다는 등의 명목을 내세워 배우의 신체를 더듬었다는 주장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이 연출뿐 아니다.

배우 A씨는 또다른 연극연출가가 식당에서 여러차례 성추행했다고 폭로했다.현재 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이 연출가가 학생들도 추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연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던 김보리(가명)씨는 밀양연극촌의 촌장도 성폭행 가해자라고 추가 폭로하기도 했다.

2009년 한 연극의 조연출로 활동했던 연극인은 현재 TV 드라마에 출연 중인 한 배우가 과거 연극 공연 때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제보하기도 했다.앞서 유명 연극배우 이명행 역시 스태프 성추행 사실이 알려지며 공연 중이던 연극에서 자진 하차했다.

이 밖에도 SNS에서는 각종 성희롱, 성추행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쏟아지는 폭로의 진위를 명확하게 가릴 수 없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시선들도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괴로워하다 이제야 용기를 내기 시작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먼저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 권력에 저항 어려운 환경…안이한 성폭력 인식·관행 치부도 문제
이처럼 연극계 미투가 쏟아지는 데 대해 우선 집단적, 도제식 교육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연극계 특성상 배우는 연출가의 요구가 부당하더라도 저항하기 힘든 환경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이윤택 연출처럼 연극계 '거장'이나 '어른'으로 자리매김한 경우 그 권한이 절대적이다.

처음 이 연출의 성추행을 폭로한 김수희 대표는 "당시 그(이윤택)는 내가 속한 세계의 왕이었다"라고 표현했고 또 다른 배우 B씨 역시 "왕같은, 교주같은 존재"였다고 묘사했다.

고연옥 극작가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문제는 단지 성적수치심을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연극계에서 어떤 입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2차 3차 가해로 이어진다"면서 "그 속에 남아있는 여성 작업자들은 문제를 느끼면서도 침묵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성폭력에 대한 안이한 인식도 한몫했다.

이 연출의 상습 성추행이 이뤄지는 동안 연희단거리패의 일부 단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경찰 신고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이 연출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재발방지 약속을 받는 데 그쳤던 것으로 드러났다.

연희단거리패의 김소희 대표는 이에 대해 "(이 연출의 행동이) 성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김 대표는 자신도 상식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안마 요구를 받았지만 거부했다고 밝히면서 "다른 후배들에게도 '거부하면 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라고 말해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알고도 모른 체' 침묵했던 연극계 풍토도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든 하나의 원인이다.

이번 사건이 불거지기 전부터 연극계에서는 이미 이 연출의 행태에 대한 소문이 팽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보리씨도 "이윤택의 왕국 속 그들은 2001년의 일을 "난리"라는 표현으로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면서 "그 이후에도 아무런 제재 없이 그는 활동했고 몇몇 (연희단거리패) 선배들은 알고도 방관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우 A씨는 자신을 성추행한 연출가에게 용기를 내어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만하시죠'라는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면서 "그때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적었다.

연희단거리패의 단원이었던 최모씨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연극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며 "이 괴물을 만든 것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는 "30년 동안 한국연극을 지탱해오시면서 연희단거리패와 동지로 살아오신 원로들, 무성한 소문들을 언급하시면서도 실질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선배님들, 그 외 여러 '연극인'이라는 직함을 달고 연희단거리패 주변에 계신 분들, 그저 연극이란 허울에 기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셔야 한다"고 비판했다.
◇ 이윤택 사과는 끝이 아닌 시작 = 이윤택 연출은 공개 사과했고 법적 책임까지 지겠다고 했지만 이 연출의 문제 해결을 넘어서 이제 진정한 연극계의 '미투'가 시작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그 동안 잘못된 '관행'들을 반성하고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연극연출가협회는 "오래전부터 여러 피해자들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던 점, 연극계 부당한 권력과 잘못된 문화가 존재하도록 방치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김재엽 연출은 "결과적인 것만으로 평가받는 연극계의 관행 속에서 불합리한 과정과 반인권적인 폭력을 감내해온 수많은 연극인들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것이 인정투쟁에 목말라하는 우리의 모습이었다"라면서 "인정투쟁에서 살아남을 연극 한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연극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도 무시해 온 우리의 연극이 과연 정당한 연극이었는가 거듭 자문하게 됩니다.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적었다.

연극계에서는 이 연출처럼 문제가 드러난 연극인을 영구 퇴출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며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성폭력 대책위 구성도 추진 중이다.

일부 연극인들은 미투를 선언한 동료 연극인들을 보호하고 지지와 연대를 나타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블랙타파)는 2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가해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문제를 포함해 대책 마련을 위한 논의를 진행한다.

관객들의 움직임도 시작됐다.트위터에서는 공연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를 지지·응원하고 가해자에 대한 비판과 처벌을 촉구하는 연극뮤지컬 관객 집회가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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