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지수'에 투자했다가 낭패 본 강남 큰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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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증시 변동성 측정지수를 역방향으로 추종하는서울 강남에 사는 40대 회사원 이모씨는 최근 ‘변동성지수(VIX)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말 증권사 추천으로 미국 증시에서 거래되는 ‘쇼트(매도) VIX 상품’에 5000만원을 투자한 게 화근이었다.
쇼트VIX 상품 투자가 '화근'
순자산 1주일새 95% 이상 급감
쇼트 VIX 상품은 미국 시카고옵션거래소(CBOE) VIX 등락의 반대 방향으로 수익률이 결정되는 상장지수펀드(ETF) 또는 상장지수증권(ETN)이다. 이씨가 투자한 쇼트 VIX ETN인 ‘벨로시티셰어즈 데일리 인버스 VIX 쇼트-텀(XIV)’은 미국 나스닥에서 지난달 중순 145달러 선까지 올랐다가 이달 6일 7달러대로 폭락했다. 미국 주식시장이 급격한 조정을 받으면서 VIX가 급등한 여파다.
미국 쇼트 VIX 상품에 투자했던 국내 자산가들이 막대한 투자 손실을 보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미국 쇼트 VIX 상품은 2016년 이후 2년 가까이 미국 증시의 저변동성 기조가 이어지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을 모았지만 최근 미국 증시 변동성이 커지면서 투자자들의 ‘무덤’으로 전락했다.
◆쇼트 VIX 상품 청산 사례 나와VIX는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의 변동성을 측정하는 지수다. 증시가 큰 폭으로 출렁일수록 상승한다. 이 지수는 2016년 3월 이후 지난달 말까지 10~20 사이에서 움직였다.
쇼트 VIX 상품은 VIX 선물을 매도하는 전략을 쓴다. 증시 변동성이 작은 시기에 이 상품은 VIX가 하락하지 않아도 선물 근월물과 원월물 간 가격 차이를 활용해 꾸준한 수익을 낸다. 스위스계 증권사 크레디트스위스가 운용하는 XIV는 2016년 이후 지난달 말까지 150%에 가까운 수익률을 올렸다.
그러나 이달 들어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미국 내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미국 증시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미국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지난 5일 4.6%(1175.21포인트) 급락했고, 이튿날인 6일 VIX는 장중 한때 50.3까지 치솟았다.VIX가 급등하면서 쇼트 VIX 상품의 순자산은 순식간에 급감했다. 6일 XIV의 순자산은 1주일 전보다 95.7%나 줄어들었다. 또 다른 쇼트 VIX 상품인 ‘프로셰어즈 쇼트 VIX 쇼트-텀 퓨처스(SVXY)’ ETF의 순자산은 ‘0’이 됐다.
크레디트스위스는 XIV를 21일 조기 청산할 계획이라고 6일 발표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청산일을 앞두고 ETN을 내다 팔려고 해도 사겠다는 투자자가 없다”며 “XIV나 SVXY 투자자는 90% 이상의 손실을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증권업계는 2016년 10억원 수준에 불과했던 국내 투자자들의 쇼트 VIX 상품 투자 잔액이 지난해 말 수백억원대로 불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심하는 한국거래소전문가들은 쇼트 VIX 상품 운용사들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레버리지(차입)를 늘린 탓에 투자 손실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쇼트 VIX 상품의 순자산이 하루이틀 새 50% 넘게 급감하는 사례는 드물다”며 “운용 과정에서 레버리지를 크게 일으킨 게 화근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올 하반기 쇼트 VIX ETN의 국내 상장을 준비하던 한국거래소와 국내 증권사에도 불똥이 튀었다. 거래소는 쇼트 VIX 상품의 인기를 고려해 올 3월 ‘롱(매수) VIX 상품’을 상장한 뒤 하반기에는 쇼트 VIX 상품을 선보일 계획이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쇼트 VIX 상품을 상장하려면 투자자 보호 장치가 더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상품 세부 구조와 출시 일정 등은 거래소와 협의해 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소 관계자는 “VIX 상품과 관련한 교육과 투자 위험 고지 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투자자 보호 장치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 변동성지수(VIX)volatility index. 미국 대표 주가지수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향후 30일간 얼마나 움직일지에 대한 시장의 예상치를 나타내는 지수. 주식시장이 급락하거나 불안할수록 수치가 올라 ‘공포 지수’로도 불린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