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가요계 혁명가 이영훈

고두현 논설위원
“굉장히 수줍어하는 그에게 곡을 좀 들려달라고 했다. 그가 마지못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첫 멜로디가 내 심장을 쳤다. 지금의 ‘소녀’였다. 나한테 곡을 줄 수 있느냐고 묻자 자기는 아마추어여서 히트도 안 될 거라며 겸연쩍어했다.” 가수 이문세가 작곡가 이영훈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한 장면이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해 서울 수유리 자취방에서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6개월 만에 9곡을 완성한 뒤 이영훈이 “쉬운 노래를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하더니 30분 만에 완성했다. 그게 ‘난 아직 모르잖아요’였다. 이문세 3집 타이틀 곡이 된 이 노래는 지상파 TV의 ‘가요 톱10’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음반은 150만 장이나 팔렸다.한국 가요계에 밀리언셀러 시대를 연 3집에 이어 4집은 285만 장을 넘으며 당시 음반 판매량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광화문 연가’가 수록된 5집은 골든 디스크 3연패 기록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라디오 음악 방송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팝송 일색이던 프로그램이 한국 가요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영훈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는 대중가요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꿨다. 팝은 고급스럽고 가요는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던 통념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는 작곡을 따로 공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배웠다.

작업 방식은 강박에 가까웠다. 피아노 앞에 앉아 커피 40잔을 마시고, 담배를 네 갑씩 피우며 밤을 새웠다. 가사 하나를 쓰는 데 한 달 이상 끙끙거릴 정도로 완벽을 추구했다. 스스로 꼽은 최고의 작품 ‘슬픈 사랑의 노래’는 가사를 완성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그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고궁을 자주 찾았다. 결혼 전 데이트도 창경궁, 경복궁, 비원 등 고궁을 돌면서 했다.

해외로도 눈을 돌렸다. 1992년 러시아로 가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하며 3개의 소품집을 냈다. 이 앨범들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음악박람회 미뎀(MIDEM)에 출품하며 한국 음악을 알리려고 애썼다.

2008년 세상을 떠난 그는 “천국에 가서도 곡을 쓰겠다”고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2011년 첫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오는 27일 그의 10주기 헌정공연이 열린다. 장소는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의 세종문화회관이다.그와 함께 작업했던 이문세 한영애 윤도현 등이 출연한다. ‘한국 팝 발라드’의 개척자인 그의 선율은 K팝 열풍으로 이어져 세계인의 마음을 녹이고 있다. 가장 부드러운 방법으로 가요계에 혁명을 일으킨 그의 음악을 오늘 다시 꺼내 듣는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