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Me Too…끝은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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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용기있는 목소리 "연대의식으로 감싸야""오랜 시간 곪은 상처가 이제야 터졌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에 대한 문화예술계의 반응이다. 왕처럼 군림해온 그들만의 왕국이 무너지고 권력의 민낯이 드러났다. 고은 시인 성추행 폭로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문화예술계부터 연예계까지 확산되고 있다.
# 한국판 미투 운동의 시작…'괴물' En선생한국판 미투 운동은 문학계에서 시작됐다. 최영미 시인은 지난해 겨울 황해문화에 '괴물'이라는 시를 싣고 한 원로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했다.
최 시인은 그를 ‘En 선생’이라는 이니셜을 썼으나 '노털상 후보', '100권의 시집을 펴낸' 등으로 묘사해 주인공이 고은(86) 시인임을 추측하게 했다.
고은 시인은 1958년 '폐결핵'으로 등단했고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으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벨상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성추행 논란이 거세지자 고은 시인은 "격려 차원에서 한 행동인데 상대방이 불쾌했다면 사과한다"고 해명했다. 사건 발생 이후 침묵하던 그는 조용히 단국대 석좌교수직을 내놨다. 또 수원시에서 무상으로 제공 받았던 주거·창작 공간인 광교산 ‘문화 향수의 집’에서도 올 하반기 떠나기로 했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최영미 시인은 "당사자로 지목된 문인이 내가 처음 떠올린 문인이 맞다면 구차한 변명이라 생각한다. 그는 상습범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너무나 많은 성추행, 성희롱을 목격했고 내가 피해를 봤다. 피해자가 셀 수 없이 많다"고 단언했다.
#신인배우 꿈 짓밟으며 성적욕구 채운 '거장' 연출가들설을 앞둔 지난 14일엔 연극계를 들썩이게 한 폭로가 이어졌다. 극단 미인 김수희 대표가 연극계 거장 이윤택(67)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성추행을 고발한 것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이 전 감독은 안마를 빙자해 여배우들을 공공연하게 성추행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17일엔 김보리(가명)라는 배우가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윤택한 패거리를 회상하며'라는 글을 게재해 이윤택 전 감독에게 성추행뿐만 아니라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물수건으로 나체를 닦거나 유사 성행위, 성기 주변 마사지 등을 했고 이 전 감독의 별채 '황토방'에서 공공연하게 성추행이 벌어졌다고 세밀하게 설명했다.
성추행 후폭풍이 거세지자 이윤택 전 감독은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 사과'를 했다. 은퇴 선언도 함께였다. 그는 성 추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적 책임을 포함한 벌도 달게 받겠다면서도 성폭행에 대해서는 "합의된 성관계"라고 일축했다.이윤택 전 감독이 성폭행에 대해 강제성 없다는 발언을 하자 기자회견장이 있던 연극배우 김지현은 자리를 뛰쳐나가 SNS에 입장을 밝혔다.
김지현은 2003년부터 이 전 감독을 안마하던 여자 단원 중 하나였고 수위는 심해져 혼자 안마를 할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또 2005년에 임신을 하고 조용히 낙태했고, 예술감독으로부터 200만 원과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았지만 사건이 잊혀갈 때쯤부터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이윤택의 가면을 벗기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배우 이승비 또한 SNS에 #MeToo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이 전 감독에 대해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힘을 실었다.
연극계 미투운동이 이처럼 확산되던 가운데 익명의 한 배우가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2004~2005년 이 전 감독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고 등을 떠민 것은 여자 선배인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방송 후 "전혀 사실이 아니"라며 "방송국 측에 정정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배우 홍선주는 "'뉴스룸' 손석희와 전화인터뷰를 한 건 나"라며 실명을 밝히고 김 대표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언론 앞에 섰던 이윤택의 성추행 사과가 치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지난 21일 연희단거리패 배우 겸 연출 오동식은 "나는 나의 스승을 고발합니다"라는 글을 통해 이윤택이 기자회견을 앞두고 '불쌍한 표정' 연기 연습을 했고 사과문은 노래 가사나 시를 쓰듯 작성했다고 폭로했다.
오동식의 내부고발성 글이 화제가 되자 이윤택 전 감독에 대한 비난과 함께 오동식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도 폭로가 나왔다. 원선혜 조연출은 오동식이 과거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면서 "이윤택이 제일 개XX지만 그 시간에 있었던 나와 오빠(오동식), 우리 모두 개XX"라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이에 대해 오동식은 원선혜 사건에 대해 사실이라며 사과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이윤택이 얼굴을 드러내고 피해자들에게 '거짓 사과'라도 했다면 극단 목화의 오태석(79) 대표는 입을 꾹 닫은 상황이다. 연극배우 A씨가 'ㅇㅌㅅ'이라는 이름의 선생에게 성추행당했다는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면서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다. 글에 따르면 오 대표는 회식 중 상 아래에서 A씨를 성추행했다.
오 대표는 목화 단원들과 대책회의를 열었고 20일 입장을 밝히기로 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어떤 해명이나 입장 발표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딸바보'인 줄 알았는데…알고보니 '캠퍼스의 왕' 연극계에 이어 연예계에도 성폭력 논란이 휘몰아쳤다. SBS '아빠를 부탁해' 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딸과 동반 출연해 '딸바보'로 인기를 끌었던 중견배우 조민기(54)가 구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젠틀하고 다정다감한 이미지는 온라인 게시판에 글이 올려진 이후 되돌릴 수 없게 됐다.
지난 20일 "청주대학교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연예인 ㅈㅁㄱ씨가 몇 년간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라는 글이 게재됐다. 청주대 교수, 이니셜 ㅈㅁㄱ으로 특정된 탓에 문제의 인물은 조민기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조민기 소속사 윌엔터테인먼트 측은 '명백한 루머'라고 부인하며 성추행으로 인한 교수직 박탈 및 중징계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민기는 JTBC '뉴스룸'에 학생들과 스킨십에 대해 "가슴으로 연기하라고 손으로 툭 친 걸 만졌다고 진술했다"라며 "수고했다는 의미의 격려 차원"이라고 해명했다.
조민기의 공식 입장은 기름만 부은 꼴이 됐다. 그의 해명에 분노한 청주대 출신 신인 배우 송하늘은 페이스북에 조민기가 오피스텔, 노래방 등지에서 학생들을 공공연히 성추행했다고 폭로했다.
송하늘이 쓴 글에는 조민기가 남자친구와 성관계 여부를 묻거나, 여학생을 침대에 눕혀 자고, 회식 자리에서 가슴을 만지고 성행위를 연상하게 하는 자세로 춤을 추며 입맞춤을 하는 등의 성추행을 당한 상황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조민기는 불과 하루 만에 '꼬리'를 내렸다. SNS 등을 통해 조민기 성추행 여부에 대한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면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확산된 점이 결정적이었다. 충북지방경찰청은 21일 조민기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소속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심각성을 인지하고 앞으로 진행될 경찰 조사에 성실히 임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조민기의 두 얼굴이 영화계 전반에 만연해 있는 성폭행 폭로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조민기 뿐만 아니라 인기 배우 오 모 씨도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오 씨는 이윤택 전 예술감독의 연희단거리패 출신이기도 하다. 이윤택 전 감독의 성폭력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불을 지폈다.
이 전 감독과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공연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쓴이는 "1990년대 부산 모 소극장에서 이 연출가가 데리고 있던 배우 중 한 명이 여자 후배들을 은밀히 상습적으로 성추행하던 연극배우"에 대해 썼다.
그는 이 배우에 대해 "변태 악마 사이코패스"라고 분노하며 "끔찍한 짓을 당하고 충격으로 20년간 고통받았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그 뻔뻔함, 반드시 천벌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폭로했다.
또 다른 익명의 누리꾼은 "이 연출가가 데리고 있던 배우 중 한 명인 오 모 씨는 할 말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유명한 코믹연기 조연 영화배우"라고 설명했다.
이어 "90년대 초반 이 연출가가 소극장 자리를 비운 사이 반바지를 입고 있던 제 바지 속으로 갑자기 손을 집어넣었다. 제게는 변태 성추행범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댓글에서 언급된 배우 오 모 씨가 네티즌이 지목한 오 모 씨인지는 알 수 없다. 오 씨 소속사 측은 현재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논란에 대한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Me Too, 그리고 With You'미투' 운동은 지난해 할리우드 스타들이 미국 거물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SNS상에 해시태그 #MeToo를 붙이고 성폭행과 성희롱 행위를 비판했다.
이후 각계에 공개 폭로가 이어져 연방 상원의원부터 방송사 앵커까지 자리를 내놨다. 지난 그래미 시상식에서 스타들은 평화와 저항을 상징하는 흰 장미를 달고 레드카펫을 밟아 미투 운동에 연대를 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국장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서 검사에 이어 임은정 검사도 과거 부장검사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한 사실을 고백하면서 '한국판 미투'가 확산됐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발생하는 고질적 범죄로 최근 불거진 일련의 논란은 상하관계에서 수직적 권력을 무기로 발생하는 경우다. 학교와 극단 내 스승과 제자, 선후배, 젠더 간의 뿌리 깊은 위계 문화가 가해자들의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자신의 폭력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됐다.
'미투' 운동을 통해 쉬쉬하던 성폭력 사건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한극 연극평론가협회는 "성폭력 사태는 특정 인물이나 극단에 국한되지 않은 연극계 전체, 더 나아가 예술계 전반의 문제이며 일회적이거나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며 "이 사태의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어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공론화에 앞장서겠다. 윤리적, 법적인 차원의 처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성폭력 신고센터를 신설해 성폭력 근절에 나설 방침이다. 아울러 문화예술계 전반의 성폭력 사례를 접수하기 위해 3월 중 예술인복지재단에 신고·상담센터를 만들고, 한국콘텐츠진흥원에는 대중문화계 성폭력 신고 창구도 마련하기로 했다.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을 지지하는 위드 유(#With You, 당신과 함께한다) 캠페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배우 최희서, 김지우, 신소율 등은 SNS에 위드 유 캠페인에 참여하는 게시물을 올려 피해자들에게 힘을 싣고 연대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도리어 명예훼손 고소 위협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폐지해달라는 글이올라있다. 현재까지 1만2000여명이 동의했다. 피해자들이 자유로운 폭로를 할 수 있도록 지지하는 보호제도 마련과 자정의 움직임이 절실한 때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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