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슐린이 찜한 단색화가 김태호 "수만번 색을 쌓아 기운(氣運)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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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노크롬 선두주자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에 본사를 둔 세계적 출판사 애슐린은 예술 분야의 고급스러운 책 편집으로 유명하다. 2007년에는 한국의 모노크롬(단색화) 회화의 진면목을 알리는 영어판 아트북 《The Color of Nature, Monochrome Art in Korea(자연의 색, 한국의 모노크롬 예술)》를 출판해 화제를 모았다. 한국 단색화 회화를 개척해온 박서보, 하종현, 정창섭, 최명영, 김태호 등 9명의 작품세계를 다뤘다. 애슐린의 세계 유통망을 통해 상류층 컬렉터와 미술관에 보급된 이 책은 사실상 한국 단색화 열풍을 주도했다.
김태호 애슐린갤러리 초대전
내달 30일까지 24점 걸어
밝고 화사해진 대형 '내재율'
2012년 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한 출발점으로 서울 청담동에 지점을 낸 애슐린이 지난달 30일 갤러리를 개관했다. 첫 전시로 포스트 단색화의 선두주자 김태호 화백을 초대했다. 해외 유명 출판사가 국내 화가의 개인전을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애슐린만의 명품 브랜딩 노하우를 통해 김 화백의 작품을 글로벌 미술시장에 소개한다는 전략이다.김 화백은 다음달 3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 벌집 모양의 소우주에서 생명력이 별빛처럼 빛나는 근작 24점을 걸었다. 전시장 1층과 지하 2층을 빼곡히 채운 작품들은 수련하듯 색을 한층한층 쌓아올린 100호 이상 대작이다.
25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애슐린갤러리는 국내 현대미술관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명품 공간”이라며 “자연 채광과 동선의 흐름, 공간의 모양을 감안해 작품들을 채웠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예술을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식한 헤겔과 메를로 퐁티 등 거장들의 생각에 젊은 시절부터 전적으로 공감했다. 서울예고 시절 우연히 박서보 화백을 만나 추상화에 빠진 그는 1970~1980년대 모노크롬 운동에 동참한 이후 색채추상 작업을 지속해왔다. 색감의 쌓기와 긁어내기를 통한 색다른 추상화법은 그를 한국 단색화 계보를 잇는 작가로 끌어올렸다. 작년 3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는 1994년 작 ‘내재율’(130×163㎝)이 추정가를 웃도는 1억3000만원에 낙찰되며 국내 생존 화가 가운데 몇 안 되는 ‘억대 작가’에 합류했다.김 화백은 ‘본다’는 행위 자체와 이미지의 중첩 현상을 시각언어로 형상화하는 데 무던히 애써왔다. 옛 한옥의 문틀이나 시골 담,조밀하게 짠 옷감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사회의 가치를 무수한 색점으로 풀어냈다. 보이지 않는 사회의 내면에 숨어 있는 가치를 탐색한 현상학자 퐁티의 안과 밖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회화에 도입했다. 안의 리듬과 밖의 구조가 동시에 만나는 이른바 ‘지워냄으로써 드러내는 역설의 구조’를 통해 현대인의 다층적 삶을 파고든 것이다. 그의 작품이 철학적인 동시에 시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유의 세밀한 공간 분할에 색채를 조화롭게 구사한 작품 제목들을 모두 ‘내재율’로 붙여 시적 미감을 한층 살려냈다. 도대체 내재율이 뭐냐고 물었다. “씨줄과 날줄이 일정한 그리드로 이뤄진 요철의 부조 그림”이란 답이 돌아왔다. 수평 형태의 땅과 수직의 인간상이 만드는 ‘그리드’야말로 차가운 시대의 경직된 사회상을 상징하는 최상의 기법임을 깨달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내재율을 얻기 위해 캔버스에 그은 격자의 선을 따라 20여 개 색을 1~1.5㎝에 이르도록 쌓아올린다. 응결된 수많은 색을 조각칼로 깎아내고 구멍을 뚫으면서 벌집 같은 겹겹의 방을 만든다. 두껍게 쌓인 층을 끌로 깎아내면 그 속에 숨어 있던 색점들이 살아나 안의 리듬과 밖의 구조가 동시에 이뤄진다.출품작들은 종전 작품과 사뭇 다르다. 색채가 전보다 훨씬 밝고 다채로워졌으며, 벌집 모형의 색점도 불규칙하고 한결 화려해졌다. 부드러운 곡선과 날카로운 선이 교차하는 기하학적 구조도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요즘 비로소 색을 세우는 법을 알 것 같다”며 “햇살과 바람, 사람을 애인처럼 끼고 색칠을 하다 보니 묘한 흥분마저 느껴진다”고 말했다. (02)517-0316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