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페더러에 또 졌지만… '젊은피 투혼' 불사른 정현

남자프로테니스 BNP파리바 8강전서 0-2 석패

49일 만에 다시 맞붙은
패기의 신예 vs 저력의 황제

정현, 맹반격에 페더러 '진땀'
1세트 5-5까지 따라붙었지만
집중력 살아난 페더러에 '무릎'

끝까지 물고 늘어진 정현
세계테니스 차세대 스타 입증
‘황제’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신예’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세계랭킹 1위·스위스)와 ‘포커 페이스’ 정현(26위·한국)의 맞대결. 남자프로테니스(ATP) 통산 97승 대 1승이란 압도적 비대칭 전력임에도, 진검승부 1세트는 5-5까지 팽팽하게 흘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황제의 집중력과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되살아났다. 패기가 저력에 눌렸다.

황제 물고 늘어진 정현정현이 49일 만에 재격돌한 페더러와의 경기에서 0-2(5-7, 1-6)로 석패했다. 1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언 웰스에서 열린 ATP 투어 BNP 파리바오픈(총상금 797만2535달러)에서다. 그는 이날 열린 8강전에서 페더러에게 두 세트를 연속으로 내주고 무릎을 꿇었다.

이 대회는 ‘제5의 그랜드 슬램’으로 불릴 만큼 역사와 전통이 깊다. 메이저 바로 아래 등급인 마스터스 1000시리즈는 1년에 아홉 차례 열리며 이번이 첫 대회다. 정현이 ATP 마스터스 1000시리즈에서 8강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정현은 기대 이상의 접전을 펼쳤다. 1세트 초반은 페더러의 강서브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정현은 자신의 서비스 게임까지 내줘 0-3으로 쫓겼다. 쫓고 쫓기는 시소게임이 시작됐다. 정현이 자신의 서브 게임을 방어하고 페더러의 서브 게임까지 따오면서 3-3까지 따라붙은 것. 하지만 페더러의 저력이 살아 있었다. 다시 3-5. 정현의 반격도 매서웠다. 노장 페더러를 지치게 하려는 듯 자신의 강점인 포핸드 랠리로 몰아가 페더러의 실수를 유도했다. 4-5에서 5-5까지 간극이 좁혀지자 올 시즌 15전 전승을 기록한 ‘거함’을 침몰시키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까지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판에 내리 2점을 주며 첫 세트를 5-7로 아쉽게 내줬다.
황제의 클래스는 달랐다

진을 다 뺀 탓인지 정현은 2세트에서 다소 무기력해 보였다. 왼다리가 불편한 듯 살짝 절룩거리는 모습까지 내비쳤다. 발바닥 물집이 터져 기권한 호주 오픈의 아쉬움이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들었다. 전세는 페더러 쪽으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쉽게 지칠 듯했던 페더러는 스트로크 속도가 줄지 않았고, 빠른 경기 템포도 그대로 유지했다. 0-3으로 끌려가던 정현은 1게임을 따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더 날카로워진 페더러의 강서브를 막아내지 못하고 1-6으로 무릎을 꿇었다.

페더러는 클래스가 달랐다. 첫 서브 평균 속도가 196㎞로 정현(182㎞)보다 14㎞나 빨랐다. 페더러는 12개의 서브로 포인트를 따낸 반면 정현은 한 개도 따내지 못했다. 정현은 공격 성공 횟수에서도 8-32로 열세를 보였다. 방향전환에서 속도가 느려지는 등 체력적인 문제도 드러냈다. 노장을 좌우로 크게 흔들어 일찍 지치게 하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오히려 페더러의 속공에 에너지를 빨리 소모하며 초반 상승세를 지켜내지 못했다.정현은 지난 1월 올해 첫 번째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 4강에서 페더러를 만났지만 발바닥 물집 부상으로 기권패했다.

가능성 보여준 차세대 주자

8강 진출로 랭킹 포인트 180점을 획득한 정현은 다음주 세계랭킹 23위까지 오를 전망이다. 정현은 올시즌 다섯 번 경기에 출전해 다섯 번 모두 8강에 진출했다. 상금 총액도 94만5741달러(약 10억1000만원)로 10억원을 넘어섰다.박용국 NH농협은행 스포츠단 단장은 “정현이 서브 게임에서 공격을 주도하며 확실한 득점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더 키운다면 세계 10위 이내 선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현은 21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개막하는 ATP 투어 마이애미 오픈(총상금 797만2535달러)에 출전한다. 정현의 도전을 잠재운 페더러는 4강에서 보르나 초리치(49위·크로아티아)와 결승 티켓을 놓고 다툰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