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14년 만에 '학점 상대평가제' 대폭 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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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 경쟁에 대학교육 의미 퇴색"… 절대평가 병행, 전공 간 벽 허물기로서울대가 ‘학점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10여 년째 시행 중인 상대평가제를 대폭 수술한다. 글쓰기 과목을 시작으로 외국어, 수학, 과학 등 기초 과목을 차례로 절대평가로 전환한다. ‘스펙용’ 학점 경쟁 과열이 대학 교육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상대평가를 고집해온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든 셈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정부 상대평가제 정책에 반기
재·삼수강으로 A학점 올인 폐해
상대평가로 오히려 '학점 인플레'
타 학문 수강 기피 현상 늘어
국어·외국어·과학 등 기초과목
올해부터 절대평가로 순차 변경
◆“학점 경쟁으로 대학 교육 의미 퇴색”서울대 기초교육원은 기초교양과목인 ‘글쓰기’ 수업의 성적 평가를 올해부터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면 전환했다. 영어 등 외국어와 수학·과학 등 기초교과목 전체로 절대평가제를 확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 중이다.
평가 방식의 전환은 상대평가제가 과도한 학점 경쟁을 불러와 고등 교육의 의미를 매몰시키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관계자는 “수업 선택의 제1 기준이 강의의 질이나 흥미가 아니라 학점이 된 지 오래”라고 설명했다.상대평가제는 수강생 중 A~F의 비율을 정해 학점을 부여한다. 보통 A학점 20~30%, B학점 30~40%, C 이하 학점 30~50%의 비율이 적용된다. 절대평가제는 비율과 무관하다. 수강생 전부가 A를 받을 수도, F를 받을 수도 있다.
한국 대학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 절대평가제였다. 학점 부여는 전적으로 교수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취업난이 심해지자 지방대를 중심으로 ‘성적 부풀리기’가 성행했다. 정부는 ‘학점 인플레’를 막기 위해 학점이 후한 대학에 지원금을 줄였다. 거의 모든 대학이 상대평가제를 하고 있는 배경이다. 서울대도 2004년부터 상대평가제를 시행했다.
◆‘학점 부여 방식 규제’는 한국이 유일학점 인플레를 방지하려는 좋은 의도와 달리 상대평가제는 학생들의 학점 고통만 가중시켰다. 좋은 학점을 받을 때까지 재수강, 삼수강 하는 것이 관행이 됐기 때문이다. 서울대 졸업생 중 우수졸업자(평균 학점 3.6 이상) 비중은 2011년 34%에서 2018년(전기 졸업) 48.8%로 높아졌다. 이재영 서울대 기초교육원장(영어영문과 교수)은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경험해야 할 귀한 시간이 ‘학점 따기’에 낭비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서울대는 올 1학기부터 ‘타 학과 전공 교과목 성적평가방법 선택제’도 도입했다. 다른 전공을 들을 때 9학점까지는 해당 과목이 요구하는 기본 조건을 충족하면 S(satisfactory), 그렇지 않을 경우 U(unsatisfactory)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다. 다양한 과목을 학점 걱정 없이 듣고 전공 간 벽을 허물기 위한 시도다. 이 같은 서울대의 움직임은 상대평가제를 사실상 강제해온 교육부 방침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학점 규제는 한국에만 있는 현상이다.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 중 학점 부여 방식을 규제하는 곳은 없다. 학점에 대한 교육부의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국양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학 교육의 본질은 줄세우기식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토론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며 “이대로라면 5~10년 내 한국 대학 교육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