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바람과 함께 사라진 일자리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수도권의 아웃도어용품업체 A사는 해외에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독보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고 생산제품의 부가가치도 높았다. 이 회사의 L사장은 제조업이 힘들어도 ‘일자리를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20년 이상 묵묵히 현장을 지켜 왔다.

그런 L사장이 창업 후 처음으로 동남아시아에 공장을 짓기로 지난달 확정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범법자’가 되기 싫어서였다. 그는 몇 달 동안 해외 공장 건설과 국내 공장 증설 간의 장단점을 저울질하며 근로시간 단축 논의를 지켜봤다. 특히 주목한 대목은 ‘탄력적 근로시간제’였다.한국 탈출하는 中企들

아웃도어용품 공장은 1년 중 6개월은 바쁘고 6개월은 한가하다. 현행 탄력적 근로시간제로는 해외 주문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의류 음료 등 많은 업종이 비슷한 상황이어서 조금이라도 생산현장을 아는 국회의원이라면 현재의 ‘최장 3개월’인 이 제도의 적용 기간을 당연히 ‘1년’으로 늘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국회가 지난 2월 말 근로시간 단축안을 통과시키면서 이런 기대가 물거품이 됐다. 종업원 300명 미만인 이 회사는 2020년 1월부터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

L사장은 “이제 준비할 시간이 2년도 채 남지 않았다”며 “내년까지 해외 공장을 완공하고 현지 근로자 숙련도도 국내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그는 “수출품 납기를 지키지 못하면 바이어로부터 손해배상청구를 당하는 걸 뻔히 아는데 잔업 시키지 않을 기업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인생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해외 공장 건설을 서두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110조는 근로시간 위반 시 ‘2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중부권의 건자재업체 B사는 증설을 아예 포기했다. 이 회사는 건설경기가 불황일 때는 하루 8시간 근무만으로도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지만 호황일 때는 달랐다. 24시간 맞교대로 공장을 돌려야 했다. 근로시간이 줄면 생산량을 신축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고 판단해 증설을 포기했다. 부족한 생산 물량은 수입으로 대체키로 했다.

근로시간 단축 보완 시급

A사와 B사가 국내 공장 증설 시 추가 채용할 인원은 약 100명에 이른다. 이런 일자리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들 업체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등 동남아 곳곳엔 해외 공장 부지를 물색하는 한국의 중견·중소기업인들로 북적인다고 기업인들은 전한다. 정부가 일자리 창출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정작 현장은 반대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그렇다면 근로자들은 행복한가. 염색업체에서 20년 이상 일하고 있는 경기도 염색업체의 K씨는 근로시간 단축 시 ‘투잡’을 뛸 생각이다. 월급이 20%가량 줄면 고등학생과 대학생 두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데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의 주당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든다. 2020년 1월부터는 중소기업 상당수도 이 조치를 적용받는다. 중견기업은 3개월도 채 남지 않았고, 중소기업들도 2년 내 닥친다. 문제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생산직 인력난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정부와 국회는 중견·중소기업 생산현장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탄력적 근로시간제 보완 등 현실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대안을 조속히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 자녀들은 머잖아 일자리를 찾아 베트남과 중국을 헤매고, 부모들은 투잡 확보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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