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품종 하나뿐인 바나나, 이대로 가면 멸종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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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제국의 몰락1800년대 초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에게 행운의 선물이었다. 감자가 전래되기까지 아일랜드인들은 영양소를 완벽하게 섭취할 방법이 없었다. 감자를 재배하면서 유아 사망률이 감소하고 기대수명이 늘어났다. 인구가 증가하자 좁은 땅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작물인 감자 의존도는 더 커졌다.
롭 던 지음 / 노승영 옮김
반니 / 400쪽│1만8000원
1845년 여름 어느 날 아일랜드의 모든 감자밭이 황폐해졌다. 1843년 미국에서 발견된 감자역병이 유럽 대륙을 거쳐 아일랜드에 상륙한 것이다. 미국 식단에서는 감자의 비중이 비교적 작았기에 농부 개개인은 막대한 손실을 봤지만 나라 전체로는 손실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감자 말고는 먹을 게 없던 아일랜드에서는 100만 명 이상이 아사하고 수백만 명이 고국을 떠났다.당시 아일랜드가 대기근을 겪은 것은 낙후된 농법 때문이 아니었다. 단일 품종 작물을 대규모로 심고 비료를 주고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은 지금과 매우 비슷했다. 아일랜드의 감자는 최초의 진정한 현대 작물이었다. 아일랜드의 비극과 같은 위험은 농업의 현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세계 곳곳으로 확산됐다. 롭 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응용생태학과 교수가 쓴 《바나나 제국의 몰락》은 이처럼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며 일어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물에 닥친 위험은 농업을 단순화한 정도에 정비례한다. 19세기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우리 식단은 점점 단순해졌다. 북미에서는 옥수수, 유럽에서는 밀, 아프리카에서는 카사바, 아시아에서는 쌀이 주 열량 공급원이다. 저자는 몇몇 작물을 제외하고는 이미 병충해 같은 천적에게 완전히 따라잡힌 상태라고 전한다.
이 책의 제목인 바나나는 극단적인 획일화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1950년대 사람들이 먹던 바나나는 지금 먹는 바나나와는 맛이 달랐다. 거대 농업기업 유나이티드프루트는 그로미셸이라는 단일 품종의 바나나를 재배하는 데 집중했다. 대부분 바나나가 중미에서 생산돼 수출됐다. 1960년대 파나마병이 발병하면서 바나나들은 썩어갔다. 그로미셸 종은 멸종 위기에 처했다. 거대 농업기업들은 다시 캐번디시라는 품종을 개발했다. 냄새가 이상하고 당도도 낮았지만 파나마병 병원체에 저항력이 있는 품종이었다. 모두가 캐번디시 종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195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 접한 바나나는 거의 캐번디시 종이다.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파나마병을 일으킨 바나나덩굴쪼김병균이 새로운 계통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 계통은 아시아에서 동아프리카로 퍼졌고 중미에도 전파될 것으로 보인다. 캐번디시 품종을 대체할 또 다른 품종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바나나가 우리 식탁에서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세계 거의 모든 작물은 한 지역에서 재배되다가 병충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경로를 걸었다. 세계가 비행기와 배로 연결된 지금은 병충해가 작물의 이동 속도를 따라잡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물 다양성이다.
저자는 생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과학자들을 소개한다.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품종을 모으고 재배 방법을 수집했다. 바빌로프 연구진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17만 종이 넘는 작물 품종을 지켜냈다. ‘운명의 날 저장고’라 불리는 노르웨이의 스발바르국제저장고가 2008년 완공됐다. 100만 종 가까운 종자가 멸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관돼 있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