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재벌개혁 정책이 헤지펀드에 먹잇감 제공… 제2·제3 엘리엇 나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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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 개편에 끼어드는 헤지펀드▶마켓인사이트 4월5일 오후 3시41분
기업 지배구조 개선 길목마다 '헤지펀드의 기습'
정부 정책을 로드맵 삼아
2012년 기업개혁 드라이브
헤지펀드, 삼성·현대차 등
지배구조 이슈 기업 겨냥
지분매입… 장기 전략 마련
헤지펀드 공격 거세질 듯
최대주주 지배력 약화시키는
스튜어드십 코드 등 도입
기업 경영권 방어 어려워져
미국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지난 4일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 환원 등에 대한 추가 조치를 요구하며 현대자동차그룹을 정조준했다. 2015년과 2016년 두 차례 삼성을 공격한 엘리엇은 이번에도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맞춰 기습을 단행했다.엘리엇을 비롯한 해외 헤지펀드는 국내 대기업 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길목마다 등장하고 있다. 기업의 민감한 지배구조 변화 과정에 개입해 손쉽게 단기 차익을 챙기려는 시도다.정부의 기업개혁을 기회로 활용
헤지펀드들은 2012년 대선후보들이 내놓은 경제민주화 정책을 기점으로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2012년 들어 국내에 장기 거주하며 대기업 지배구조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해외 헤지펀드 운용역이 눈에 띄었다”며 “당시 지배구조 개편이 예상된 삼성 현대차그룹 등의 핵심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헤지펀드도 있었다”고 말했다. “헤지펀드들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덫’을 놓고 기다렸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며 이름을 알린 엘리엇도 2012년부터 일찌감치 삼성 현대차 등 4대 그룹 지배구조에 관심을 갖고 장기간 전략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해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며 재벌개혁 정책에 고삐를 죄자 헤지펀드 공격도 탄력을 받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과 현대차가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기 위해 지배구조 개편에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 현대차그룹이 현대모비스 인적분할 등을 할 것이라고 분석한 외국계 증권 보고서가 2012년 쏟아진 것도 우연은 아니라는 얘기다. 투자은행업계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재벌 개혁 드라이브가 헤지펀드의 먹잇감 공략을 위한 로드맵으로 활용된 셈”이라고 말했다.
합병·분할 안건 집중 공략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이 본격화된 이후 헤지펀드의 기업 공략 방식도 바뀌었다. 2003년 SK를 공격한 헤지펀드 소버린, 2004년 삼성물산 지분을 사들인 영국 헤르메스, 2005년 KT&G에 공세를 펼친 미국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은 대주주 지분이 낮은 기업을 겨냥했다. 이들은 대주주와 경쟁할 수 있는 지분을 매입해 이사회 장악 등 경영권을 노렸다.
최근 헤지펀드는 이사회 장악보다 지배구조 관련 주총 안건 부결과 여론전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 공격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오는 5월29일 예정된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 주주총회를 앞두고 복병처럼 등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헤지펀드의 공격 행태 변화에는 소수 지분으로도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지배구조를 손질하려는 기업 상당수는 분할과 합병 작업 등을 거친다.분할·합병 안건은 특별결의 사안이기 때문에 주총에 출석한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 발행주식의 3분의 1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통과된다. 출석한 주주의 과반수와 발행주식의 4분의 1 이상만 찬성하면 통과되는 일반결의보다 많은 찬성표가 필요하다. 헤지펀드는 소수 지분만 들고도 외국인투자자를 중심으로 표결집에 나서 기업을 위협할 수 있다.
대주주 지배력 규제도 촉매
대기업들이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방법으로 지배구조 개편에 앞다퉈 나서는 가운데 정부가 집중투표제와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등을 통해 소액주주와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한 것이 헤지펀드들에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의견도 나온다. 최대주주 지배력의 틈새를 노리는 헤지펀드가 뛰어들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는 지적이다.여당이 추진하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이 담긴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헤지펀드의 공격은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가 도입되면 외국계 투기자본이 연합해 10대 기업(공기업 및 금융회사 제외) 중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기아자동차, SK이노베이션, 현대모비스 등 여섯 곳의 감사위원을 모두 장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