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혁명' 유통빅뱅 시대에… 골목상권 보초만 서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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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규제 6년의 그늘서울 도봉구에서 기업형 슈퍼마켓(SSM)을 운영하는 안모씨는 10년간 꾸려온 가게를 접을지 고민하고 있다. 2012년 월 2회 의무휴업(둘째·넷째주 일요일)을 할 때만 해도 매출이 5~10% 정도 줄어드는 데 그칠 것으로 생각했다.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일요일은 마트 문 닫는 날’이라는 인식이 생긴 소비자들은 평일에도 발길을 끊기 일쑤였다. 인근에 대형 슈퍼마켓까지 생기면서 매출이 더 줄었다. 인건비 등 각종 비용은 올라 적자를 보는 달도 늘었다.
낡은 규제에 묶인 유통산업
강제 휴무·출점 제한 등
대기업 마트 억누르자
중대형 슈퍼가 '王노릇'
전통시장 여전히 기 못펴
규제 효과 입증 안됐는데
정부, 복합쇼핑몰도 '조준'
적자로 돌아선 대형슈퍼대형마트와 SSM의 신규 출점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을 강제하는 유통규제가 시행된 지 6년이 지났다. GS수퍼마켓이 2년 전부터 적자로 돌아선 데 이어 업계 1위 롯데슈퍼도 지난해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브랜드파워를 믿고 가맹점 계약을 맺은 점주들도 폐점 위기에 몰리고 있다.롯데슈퍼는 유통규제 시행 이후 연간 매출이 2조3000억원대에서 3년간 정체를 보이다가 2016년부터 줄기 시작했다. 2년째 매출 감소세가 이어지면서 지난해 창사 17년 만에 첫 영업적자를 냈다. 2위인 GS수퍼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해 매출 1조4598억원, 영업손실 132억원을 냈다. 2년간 누적 영업적자는 300억원에 달한다. 실적을 공개하지 않은 홈플러스익스프레스도 매장 수가 줄어드는 등 상황이 좋지 않다. 2014년 375개였던 점포 수는 지난해 말 366개로 줄었다.
‘출점 제한’ ‘월 2회 의무휴업’ 등의 규제가 시행되면서 SSM업체의 매출 감소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규제 영향은 ‘쉬는 일요일 매출’이 줄어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SSM업체의 한 관계자는 “일요일 매출은 평일 대비 1.5배 많아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경쟁은 치열해지고 고정비까지 오르는 삼중고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대기업 본사뿐만 아니라 가맹점주의 어려움도 커지고 있다. 영세한 가맹점은 본사와 달리 비용부담이 커지면 운영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다. 서비스 질이 떨어지고 매출은 더 하락하는 악순환이다. 롯데슈퍼, GS수퍼 등 SSM 브랜드로 운영되는 1350개 매장 가운데 가맹점 숫자는 339개(2017년 말 기준)에 그친다.또다시 꺼내든 규제카드
정부는 대형마트와 SSM 등 유통 대기업의 영업을 규제하면 소비자 발길을 전통시장으로 돌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수혜는 엉뚱한 데 돌아갔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규제 사각지대에 있던 중대형 슈퍼, 농협 하나로마트 등이 대표적이다. 생활용품업체 다이소가 급성장해 ‘유통 공룡’으로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구·경북 지역 등에서 ‘탑마트’ 77개 점포를 운영하는 서원유통을 비롯해 한국유통, 하나마트, 세계로마트 등이 주요 업체로 꼽힌다. 서원유통은 지난해 매출 1조5790억원, 영업이익 800억원이 넘는 대형 유통업체로 성장했다. 세계로마트의 지난해 매출은 962억원으로 2012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업계 관계자는 “어느 정도의 프리미엄 전략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SSM과 달리 ‘박리다매’하는 중대형마트는 전통시장 소상공인과 타깃 소비자가 같다”며 “경기 안산과 강원 속초 등 여러 지역에서 중대형마트가 들어선 이후 개인슈퍼들이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유통규제와 전통시장 활성화의 상관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많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와 조춘한 경기과학기술대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유통규제효과 분석 및 대중소유통 상생방안(인천 경기 등 6개 지역 6개 대형마트 반경 3㎞ 이내 거주하는 소비자의 카드사용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2016년 전통시장에서 소비된 금액은 전년보다 3.3% 줄었다. 같은 기간 SSM 소비가 줄어든 것(-1.3%)보다 감소폭이 컸다.
유통규제 효과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았지만 정부는 의무휴업과 영업시간 단축 대상에 복합쇼핑몰까지 포함하는 내용의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쇼핑몰이 단순한 쇼핑 공간이 아니라 문화, 레저, 스포츠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하는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발상이란 지적이 나온다. 조 교수는 “시장은 온·오프라인 경쟁, 탈지역 경쟁으로 바뀌고 있지만 규제는 이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대형 유통업체를 규제하면 소상공인이 살아날 것이란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어떻게 지역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일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