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조선통신사가 반해 갈 때마다 머물렀던 그 곳, 후쿠야마 항구마을 속으로
입력
수정
지면E6
색다르게 즐기는 일본여행 (10) 히로시마 남부히로시마 남쪽 끝 후쿠야마의 작은 마을에 닿았다. 도모노우라, 이름도 낯선 곳이다. ‘일본의 지중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섬들이 둘러싼 세토내해에 있는 항구마을이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 <만엽집>에 등장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18세기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가 이 마을의 아름다움에 반해 들러 가는 곳이었다.일본의 대표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 마을을 사랑했다. 6개월 넘게 이곳에 머물며 단골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스케치를 하고 이미지를 구상해 2008년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를 제작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관광안내소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과 사인이 걸려 있다. ‘영화 울버린:사무라이’, 일본 영화 ‘깨끗하고 연약한’, 일본 드라마 ‘유성왜건’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 마을에서 촬영됐다. 항구 전망대에서 오롯이 내다보이는 한적하고 잔잔한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주변 풍경이 병풍처럼 눈부신 후쿠젠지
후쿠젠지 사찰 마루에 앉으면
여덟 개 창문은 한 폭의 그림액자
영화 '울버린' 찍은 도모노우라 항구
에도시대의 건축물 등 유적 많아
후쿠젠지는 세토내해의 아름다운 바다를 앞에 두고 절벽 위에 세워진 사찰이다. 헤이안 시대인 950년 창건했다. 본당과 그에 인접한 객사 다이초로는 에도시대 건립됐다. 한국과 일본,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굴곡진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역사를 지닌 두 나라는 조선과 에도시대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할 만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대마도를 거쳐 에도로 가는 동안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 머무르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도모노우라 후쿠젠지 다이초로는 조선통신사가 머물던 영빈관이다.후쿠젠지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748년 후쿠야마 번에서 조선통신사 500여 명이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열 번째 조선통신사가 도모노우라항에 도착했을 때 오이타현 대관들이 후쿠젠지에 묵고 있었다. 후쿠젠지는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마다 묵던 숙소였기 때문에 통신사들은 그곳을 숙소로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후쿠야마 번 관리는 다른 이유를 댔다. “후쿠젠지에 우물이 없어 물이 부족하다. 문 앞에 민가들이 있어 좁을 뿐 아니라 절의 바로 뒤가 절벽이라 화재 시 피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말에 예전에 통신사 일행으로 참가했던 사람이 강한 불만을 표했다. 관리는 당황해 “후쿠젠지가 전날 화재로 타버렸다”고 말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후쿠젠지가 일본 제일의 경치라고 들었다. 화재로 소실됐지만 사찰이 있던 절벽 위에 올라보고 싶다”며 후쿠젠지에 들어가려 했다. 관리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사절단 한 명이 후쿠젠지로 들어가 사찰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화가 난 사절단은 다른 숙소에 가지 않고 그날 밤을 배 위에서 보내며 다음날 새벽, 에도를 향해 출발했다.사절단은 에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도모노우라에 들러 후쿠젠지에서 머물렀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통신사의 정사였던 홍계희는 아름다운 풍경에 찬탄하며 머물렀던 장소에 ‘다이초로(對潮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이초로는 ‘조류를 기다리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도모노우라항에서 조류와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조선통신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아버지 홍계희를 따라온 홍경해는 다이초로라고 써서 사찰의 주지에게 잘 보이는 곳에 걸어달라고 요청했다. 주지는 지나가는 배에서도 볼 수 있는 곳에 현판을 붙였다. 나중에 목조현판으로 제작됐는데 지금은 후쿠젠지 다이초로 경내에 걸려 있다.
후쿠젠지 다이초로 마루에 앉아 가만히 둘러본다. 마치 액자처럼 여덟 개의 창이 열려 있다. 동쪽 창으로 내다보면 ‘신선이 도취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센스이지마의 작은 섬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남쪽 창으로 바라보면 멀리 시코쿠의 산들이 둘러 있다. 필름 한 컷 한 컷이 지나가듯 창마다 열린 잔잔한 풍경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경내에는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미니어처가 전시돼 있다. 이곳 사람들이 조선통신사를 성대하게 맞이했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350년 전통을 간직한 명주 호메이슈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도모노우라의 골목은 매력적이다. 좁은 길을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수백 년 전 거리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어딘지 모르는 골목은 그리움이다. 한적한 골목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하나 둘 들락거리는 건물이 있다. 오타케주타쿠, 도모노우라를 대표하는 상인이 살던 집이다. 1991년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이곳에서 도모노우라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주 호메이슈(保命酒)를 판매한다. 오타케주타쿠는 호메이슈를 저장하는 창고였다. 호메이슈의 역사와 주조 과정도 볼 수 있다. 호메이슈는 16가지 약재를 넣어 만든 술로, 약 350년 전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가옥에서도 오랜 전통이 느껴진다. 도모노우라 항구의 옛 모습이 그려진 그림들이 걸려 있고 기념품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다가 작은 잔에 따라 놓은 시음용 호메이슈를 한 모금 마셔봤다. 약재 향이 진하면서도 뒷맛은 달달하다. 단맛은 찹쌀에서 나온 자연적인 것이라고 한다. 술맛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름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이라 단맛에 홀짝홀짝 마시다가 취할지도 모르겠다. 주인이 술에 대해 하나씩 설명하는데 자세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몸에 좋은 술이라는말 같았다. 도모노우라에서만 생산되는 술이라니 작은 병에 담긴 호메이슈 한 병을 사들고 골목으로 다시 나섰다. 그늘이 드리운 골목 끝에 쏟아져 내리는 빛을 향해 걸어갔다.
에도시대 풍경 그대로 도모노우라 조야토
빛을 따라 나오면 바다가 펼쳐진 항구가 나온다. 작은 배들을 정박해 놓은 항구는 소박하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옛정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파도마저 잔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골목에서 도모노우라항의 옛 모습이 담긴 엽서 한 장을 사들고 나왔는데 그 모습 그대로다. 부두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두 청년도 사색에 잠긴 듯 서로 말이 없다.
항구에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에도시대 무사이자 개혁가인 사카모토 료마의 기념관인 이로하마루 전시관이 있다.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던 사설 해군, 가이엔타이를 태운 이로하마루가 도모 앞바다에서 기슈번의 군함과 충돌해 침몰했다. 전시관에서 ‘이로하마루’의 유품과 침몰 상황을 볼 수 있다.
일본 영화 ‘천재탐정 미타라이:살인 사건의 진실’ 배경이 된 항구에는 다마키 히로시의 사진이 실물처럼 서 있다. 아름다운 항구는 일본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됐다.
길의 끝에는 작은 가로등 모양의 건축물이 서 있다. 항구 주변을 밝히기 위해 밤새도록 불을 켜놓는 상야등(常夜燈)인 도모노우라 조야토다. 이 상야등은 1895년 세워졌다. 에도시대 건축물인데도 별다른 흠집도 없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모노우라를 대표하는 건축물 답게 높이가 10m를 넘는다. 일본에 남아 있는 에도시대의 상야등 중에서 도모노우라 조야토가 가장 크다. 계단으로 된 선착장의 풍경은 당시 에도의 풍경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선착장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기모노를 차려입고 종종걸음으로 항구를 걸어가는 에도시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갈 것만 같다.여행메모
히로시마에서 도모노우라까지 가려면 후쿠야마행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시외버스는 히소시마 버스센터에서 타면 되고 후쿠야마까지 대략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버스 운임은 왕복 4200엔. 버스는 20~30분에 한 대씩 있다. 후쿠야마역에서 도모베쓰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더 들어가면 도모노우라에 도착한다. 도모노우라는 천천히 걸어다녀도 2시간 정도면 다 둘러볼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후쿠젠지에서 바라보이는 센스이지마까지는 마치 해적선처럼 생긴 작은 흑선을 타고 가면 된다. 후쿠젠지 앞 도모노우라 선착장에서 출발하며 매시 15분, 35분, 55분에 배가 있다. 센스이지마 중앙에 있는 전망대(고젠야마 전망대)의 풍경이 일품이다.히로시마=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