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열기구 타고 포도밭 한눈에… 호주에 가면, 와인도 모험이 된다

나보영의 '걸어서 와인속으로' - 호주 와인 투어

호주 여행

5월 호주는 완연한 가을
160년 역사 와이너리 '세펠츠필드'
내가 태어난 해 와인 맛볼 수 있어

멕라렌 베일의 '앙고브 와이너리'
포도밭 파노라마 뷰 레스토랑 환상적

호주 와인은 가볍고 어리다?
우아한 농축味 잊을 수 없을 것
이 세상에 와인을 만드는 나라는 많고 많지만, 호주만큼 다양한 모험이 가능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땅이 넓고 기후도 다양하며 규제는 까다롭지 않아서 와인 생산자들은 무엇이든 꿈꾸고 시도한다. 기술과 투자도 갈수록 늘어나 뛰어난 와인들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풍부한 자원 위에 여러 문화권이 어울려 이뤄낸 미식 또한 탁월하다. 콧대도 높지 않고 격식을 내려놓을 줄 아는 호주 사람들 덕분에 여행자의 발걸음은 더 가벼워지고, 때로는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모험도 펼쳐진다.

열기구를 타고 상공으로 날아올라 포도밭을 굽어보거나, 포도가 무르익는 언덕 및 인근 해변에서 야생동물과 조우하거나, 100년이 훌쩍 넘은 와인 저장고에서 자신이 태어난 해의 포도로 제조한 와인을 마시는 드라마틱한 일들이 기다린다.
포도밭이 한눈에 펼쳐지는 앙고브 와이너리 테라스
바로사 밸리, 나만의 와인 만들어보자

와인을 찾아 호주로 떠나는 여행자들은 시드니를 거쳐 애들레이드로 날아가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한다. 호주 와인의 대명사인 시라즈의 고향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그랜트 버지(Grant Burge), 세인트 할렛(St. Hallett), 피터 레만(Peter Lehmann), 펜폴즈(Penfolds), 울프 블라스(Wolf Blass), 제이콥스 크리그(Jacobs Creek) 등의 유명 와이너리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와이너리 이름 옆에 셀라 도어(cellar door)라고 적힌 걸 볼 수 있는데, 방문객이 와인을 시음할 수 있도록 개방된 곳이라는 뜻이다.
펜폴즈를 방문하면 몇 가지 포도 품종을 블렌딩해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어 볼 수 있고, 제이콥스 크리그에서는 포도밭 피크닉이 항상 인기다. 바로사 벌룬 어드벤처스(Barossa balloon adventures) 같은 열기구 액티비티 업체를 통해 상공으로 날아올라 유수의 와이너리를 굽어보는 것도 가능하다. 시도해본 사람들은 저마다 “생애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바로사 밸리의 와이너리들을 직접 방문한 일이 떠오른다. 수확기의 끝자락인 5월, 호주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160년이 훌쩍 넘은 와이너리 세펠츠필드(Seppeltsfield)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1851년부터 3세대에 걸쳐 주정 강화 와인을 제조하고 있는데, 2015년에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 부부가 다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호주는 18세기 초중반까지 주정 강화 와인으로 유명했는데, 세펠츠필드는 그 긴 역사의 산증인 격이다. 오래된 오크통이 도열한 모습에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묵직한 오크통의 마개를 열고 와인을 뽑아 올리는 모습에선 경이로운 느낌마저 든다. 와이너리 안내자가 오크통 사이를 거닐며 방문객이 태어난 해의 포도로 제조한 생년 빈티지(vintage·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를 수확한 해) 와인을 꺼내준다. 농밀하고 강렬한 맛을 음미하는 건 물론이고 낯선 여행자끼리 나이를 터놓고 호형호제하면서 친해지는 묘미까지 더해진다.

멕라렌 베일, 파노라마 뷰의 포도밭

바로사 밸리에서 약 100㎞ 떨어진 맥라렌 베일(McLaren Vale) 역시 호주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와인 생산지다. 해안과 인접한 완만한 경사에서 자라는 시라즈와 그르나슈가 최상의 품질을 지켜오고 있다. 옛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인 시라즈 트레일(Shiraz Trail)이 지나고, 포도밭에선 귀여운 야생 동물들이 등장하며, 패러글라이더가 떠다니는 해변도 가까워 여행자를 더욱 설레게 한다.

호주와인협회(Wine Australia) 사람들과 함께 130년간 5세대에 걸쳐 가족경영을 이어오고 있는 앙고브(Angove) 와이너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레스토랑의 테라스에서 180도의 파노라마 뷰로 펼쳐지는 포도밭이 어찌나 근사하던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맛본 수령이 긴 포도나무로 만든 와인들의 우아한 농축미를 잊을 수 없다. 직접 가볼 기회가 된다면 오래된 밭에서 나온 시라즈와 그르나슈를 꼭 맛보길! 호주 와인은 가볍고 어리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깊은 매력에 반할 것이다. 오후엔 가까운 포트 윌룽가(port willunga) 해변을 걸어도 좋다. “바람이 적당해서 서퍼와 패러글라이더들이 주로 찾는데, 와인 애호가들이 한껏 마신 와인에서 잠시 깨어나기에도 좋다”고 와인 생산자들은 귀띔했다.

애들레이드에서 여정을 마치는 여행자라면 애들레이드 힐스 지역 와이너리들도 둘러본 뒤 1850년대 자유 정착민 아서 하디(Arthur Hardy)의 별장이었던 마운트로프티하우스(Mount Lofty House)호텔에 하루쯤 머물러 보기를. 고풍스러운 건축물, 두 개의 포도밭,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등이 환상의 휴식처가 돼줄 테니까.호주 와인의 재발견, 피노 누아와 피노 그리

멜버른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가까운 와인 생산지를 찾고 있다면 모닝턴(Mornington)반도가 제격이다. 삼면이 바다로 트여 있고 언덕에선 포도들이 자라는 근사한 풍경으로 유명하다. 멜버른에서 약 70㎞, 차로 1시간이면 닿는데도 기온은 훨씬 시원해 여름 피서지로도 손꼽힌다. 서늘한 기후에 걸맞게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그리가 자라는데, 호주 와인은 시라즈가 전부인 줄 알고 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맛있다. 중심부에 자리한 포트 필립 에스테이트(Port Phillip Estate)에서 해산물에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을 땐 호주 화이트 와인의 신세계를 본 듯한 기분이었달까. 모닝턴반도엔 이런 와이너리가 50곳 넘게 모여 있다. 6월에 열리는 윈터 와인 위크엔드(Winter Wine Weekend)나 10월에 열리는 메인 스트리트 페스티벌(Main street festival)도 모닝턴 반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축제다. 현지인들과 어울려 현지 음식 문화를 경험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와인에 좀 더 집중하는 여행자들은 인근의 야라 밸리(Yarra Valley)로 넘어가 더 많은 와인을 맛본다. 모닝턴반도에서 110㎞, 멜버른에서는 45㎞ 떨어져 있는데 피노 누아를 중심으로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즈 등이 자란다. 야라 밸리에서 만난 생산자들은 “이 지역 품종은 다양하고 다재다능하며 변화무쌍하다”고 입을 모았다.

와이너리 이름을 재즈 명반 제목으로 지어 그 특성을 표현한 곳도 있으니, 이름하여 ‘자이언트 스텝스(Giant Steps)’다. 원래는 재즈 연주자 존 콜트레인의 음반 제목으로, 자유로운 코드 진행을 거인의 발걸음에 빗댄 단어다. 자이언트 스텝스의 창립자가 거기서 영감을 얻어 와이너리 이름으로 붙였다고 한다. 와인의 다채로운 변주가 의미 있는 건 폭넓은 음식과 궁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자이언트 스텝스의 레스토랑에서 일본식 회, 동남아시아식 스프링 롤, 스페인 생햄, 이탈리아 피자 등 다국적 메뉴에 와인을 마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곳의 책임 와인 메이커이자 세계 언론에도 등장하는 와인 양조자인 스티브 플램스티드(Steve Flamsteed)는 “야라 밸리의 피노 누아가 지닌 섬세한 미각과 다양한 풍미는 아시아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고 강조했다.

야라 밸리의 와인 메이커 중엔 개성 넘치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메이어(Mayer) 와이너리의 유쾌한 괴짜 티모 메이어(Timo Mayer)가 떠오른다. 깊은 산중의 와인 농가는 마치 산장 같았고, 텁수룩한 수염의 그는 사냥꾼 같은 인상을 풍겼다. 이 사나이는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블렌딩의 와인을 내놔 깜짝 놀라게 하는가 하면, 와인을 시음할 때 쓰는 전문적인 스피툰(spittoon: 남은 와인을 따라 버릴 수 있도록 준비된 통) 대신 안 쓰는 냄비를 활용하는 소탈함도 보였다. 그 덕분에 친구 집에 놀러간 듯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격식 없이 가볍고 즐겁게 와인 여행을 하고 싶다면 역시 호주만한 곳이 없다.

와인 애호가의 버킷리스트, 태즈메이니아

와인과 함께하는 최고의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멜버른 동남쪽의 태즈메이니아(Tasmania)야말로 최종의 버킷리스트다. 푸른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국립공원과 세계 유산이 산재해 태고의 섬으로 불린다. 호주사람들은 해방감을 맛보고 싶을 때 태즈메이니아를 자동차 또는 자전거로 일주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곤 한다. 서늘한 기후에서 나오는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 와인이 그 여행에 친구가 돼준다.

자연의 삶을 동경한다면 조세프 크로미(Josef Chromy) 와이너리로 가자. 영화 같은 풍경 속에서 플라이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전문 강사들이 있어 경험자는 물론이고 낚시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초보자도 참여할 수 있다. 가끔 어린이들이 성인보다 큰 고기를 잡아 올리는 역전극도 벌어진다. 낚시가 끝난 뒤에는 와인 시음과 근사한 점심이 기다린다.

예술을 선호한다면 ‘아트 와이너리’로 불리는 무릴라(Moorilla)를 놓치지 말자. 와인 시음과 투어는 물론이고 재즈 공연도 볼 수 있으며, 건물 자체가 건축 예술품인 부티크 호텔 모나파빌리온(MONA Pavilions)에 묵을 수도 있다. 클라이맥스는 이곳의 미술관 모나(MONA·Museum of Old and New Art)다. 호주에서 가장 큰 개인 미술관으로 유명한데,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이 많아 세계 예술가들의 찬사를 얻고 있다.

태즈메이니아는 내게도 아직 버킷리스트다. 멜버른 여행 중에 만난 태즈메이니아 와인 생산자들이 펼쳐보인 사진을 떠올리니 당장 비행기 표를 사야 할 것 같다. 저녁 무렵 재즈 공연에 심취한 뒤 별과 풀벌레를 친구 삼아 밤늦도록 와인을 마셔야지! 우아한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가 벌써 입안에 감도는 듯하다.

호주=글·사진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여행 정보

바로사 밸리와 맥라렌 베일은 애들레이드공항, 모닝턴반도는 멜버른공항에서 가깝다. 태즈메이니아는 멜버른에서 페리선이나 항공기를 타면 된다. 인천에서 직항은 없으니 먼저 시드니로 들어가자. 관광과 미식을 즐겨도 좋고 인근 와인 생산지 헌터밸리를 둘러봐도 좋다. 와이너리들에 관한 정보는 호주와인협회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열기구 투어나 포도밭 피크닉 등의 여행 정보는 호주정부관광청에서 확인하면 된다. 국내에서 열리는 호주 와인 행사는 호주대사관 무역대표부를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