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온도] 열반의 섬에서 바다를 안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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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E6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의 여행에세이아침에 눈을 뜨니 바다가 성큼 문 앞에 다가왔습니다.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필리핀의 작은 섬인 푸에르토 갈레라의 니르바나(열반) 리조트에서는 바다가 바로 방문 앞까지 다가옵니다. 푸에르토 갈레라라는 낯선 지명의 섬을 알게 된 것은 5년 전입니다. 필리핀에서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장님을 따라 취재를 간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 한국인 사장님은 아예 섬에 작은 집을 사서 1년에 두 달 정도는 그곳에서 사는 분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성격도 호방한 데다 잔정도 많은 분이어서 지역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필리핀 아이들이 제대로 된 옷을 입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국인 사장님은 아름다운 가게나 의류업체의 지원을 받아서 옷을 수백 벌 가지고 가 아이들에게 나눠줍니다. 작은 섬에서 사장님은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입니다.
어느 날 사장님이 “최 기자님, 이 동네 작은 리조트가 있는데 거기 한번 묵어 보세요. 시설은 별로 안 좋은데 경치가 끝내줍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해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리조트에서 하루를 묵어 보니 섣부른 오해였습니다. 사장님 말대로 시설은 열악했지만 리조트에서 보는 달과 별과 태양과 바다는 남달랐습니다. 밤에 비추는 달은 슈퍼 문이 무색할 정도로 크고 은은하고 낭만적이었습니다.
밤바다 위로 별들이 쏟아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감미로운 노래에 귀 기울이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이면 바다가 가볍게 방문을 두드립니다. 발 하나만 더 떼면 바다로 잠길 것 같은 리조트는 대단히 독특했습니다.무엇보다 니르바나의 일출은 황홀했습니다. 작은 빛이 올라오다 갑자기 봉긋 노랗고 붉은 공이 튀어 올라옵니다. 그러더니 금방 사위를 밝힙니다.
요즘 친구들 말로 감동 돋는 풍경입니다. 금빛 햇살에 혼곤하게 젖을 때면 저 멀리서 고깃배가 항구로 들어옵니다. 항구에는 아이들이 몰려들어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지 살펴봅니다. 아쉽게도 그렇게 많은 고기를 잡지 못했네요. 새벽부터 고기 잡느라 피곤했을 법도 한데 어부의 얼굴은 환하기 그지없습니다. 뱃전에 모여든 아이들에게 필리핀 토착어인 타갈로그어로 무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의 손마다 들려 있는 작은 바가지나 비닐에 생선을 일일이 나눠준 어부는 집에 가지고 갈 생선을 들고 기세 좋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리조트 앞에는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작은 가게가 있었습니다. 다소 몸집이 있는 필리핀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자기도 한국에 살았던 적이 있다며 간단한 한국음식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아침에 먹을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하니 라면을 끓여줍니다. 반찬으로는 김치가 올라왔습니다. 필리핀 남부의 이름 모를 작은 섬에서 먹는 라면은 정말 맛있었습니다. 라면을 발명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노벨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식사를 하고 섬을 둘러봅니다. 작은 섬이라 차를 타고 돌면 두 시간도 안 돼서 다 돌 수 있습니다. 시골마을답게 모든 것이 불편해도 행복했습니다. 이방인에게 기분 좋게 웃어주고 악수를 하기도 합니다. 리조트와 이웃한 자동차 수리점에서는 술 한잔 하자는 손동작을 보여주며 놀러 오랍니다. 염치불구하고 저녁 때 수리점으로 놀러 갔더니 불랄로(한국의 갈비탕 비슷한 필리핀 전통음식)에 필리핀 테킬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사탕수수로 만들었다는 술은 치명적으로 독하고 달큰합니다. 술 몇 잔에 불랄로 몇 점을 먹으니 금세 술이 오릅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필리핀의 국민영웅인 파퀴아오가 복싱경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저 선수를 안다고 하니까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들도 “한국의 박지성을 안다”며 연신 엄지를 올려세웁니다. 기분 좋게 복싱도 보고 소박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정 많은 필리핀 친구도 사귀고 돌아오는 길, 니르바나 리조트 아래 바다가 보였습니다. 바다는 점잖게 내일을 준비합니다. 온통 세상을 화려하게 태울 새벽을 준비하며 조용하게 뒤척이고 있습니다. 수많은 바다를 보았지만 니르바나 리조트에서 본 것처럼 생명력이 가득하고 따스한 바다를 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그 바다에 깃들고 싶습니다.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