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결단의 리더십' LG그룹 3세대 총수 구본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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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20년만에 1995년 회장 승계…럭키·금성 등에서 실무경험
디스플레이·이차전지 세계 1위…마곡 LG사이언스파크로 R&D 새 지평
LG트윈스 창단 첫해 '우승신화' 이룬 '구느님'…아들 잃고 조카 입양
끈기와 결단의 리더, 야구를 사랑한 기업인, 양자를 후계자로 키운 총수.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전 회장과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에 이어 LG그룹의 '3세대 총수직'을 23년간 수행하며 LG전자와 LG화학 등 여러 글로벌 기업을 키워낸 고 구본무 회장에게 붙는 수식어들이다.연세대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해 애쉬랜드대학과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각각 경영학을 전공한 뒤 귀국, 1975년 ㈜럭키에 입사하는 것으로 기업 활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과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 등의 직위를 차례로 거치면서 럭키와 금성사의 기획조정실 등 그룹 내 주요 회사의 영업, 심사, 수출, 기획업무 등을 두루 섭렵하며 다양한 실무경력을 쌓았다.
특히 1985년 이후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전무와 부사장의 직책을 맡아 그룹경영 전반의 흐름을 익히는 기회를 가졌고, 1989년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경영 수업을 본격화했다.1989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에 선임돼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 네트워킹을 강화하며 경제 및 경영 전반에 대해 논의하거나 의견을 청취하는 등 대외 활동의 보폭을 넓혔다.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20년만인 1995년 그룹의 회장직을 승계받았다.
부친인 구자경 회장보다는 5년 늦은 50세에 그룹경영을 맡았지만 전 회장이 건강한 상태에서 승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는 게 재계의 평가였다.고인은 다양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그룹 핵심 사업인 전기·전자와 화학 사업은 물론 통신서비스, 자동차부품, 디스플레이, 에너지, 바이오 등 신성장 사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거듭했다.
정도 경영, 가치창조형 일등주의, 도전주의와 시장선도 등을 경영 이념으로 삼았던 고인은 그룹 기술자문위원회와 해외사업추진위원회 등의 위원장 자격으로 LG그룹의 '기술개발력 제고'와 '세계화 추진' 등 제2의 경영혁신을 주도적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평소 '글로벌 경영에서는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 '신규 사업은 시작하면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매사에 '최고'를 추구하는 점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받는다.GS, LS, LIG, LF 등을 계열 분리하고도 매출은 30조원대(1994년 말)에서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이상, 해외 매출은 약 10조원에서 약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신장시키는 등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그룹 관계자는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면서 용기 있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끝까지 도전해 결실을 보는 구 회장 특유의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이 힘을 발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LG디스플레이의 대형 올레드(OLED) 사업, LG화학의 이차전지 사업을 글로벌 1위로 이끌고, 최소 3년 걸릴 것이라던 LTE 투자를 9개월 만에 끝내고 이동통신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도 이런 고인의 끈기와 결단이 근저에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럭키금성에서 'LG'로 CI를 변경하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등 기업문화를 과감하게 바꿔 놓은 것도 고인의 역할이 컸다.최근에는 서울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4조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사이언스파크'를 건립하며 LG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첨단 연구개발(R&D)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인은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LG트윈스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자율경영을 구단 운영에 접목해 '깨끗한 야구, 이기는 야구'를 표방, 창단 첫해인 1990년 시리즈에서 예상을 뒤엎고 우승하는 신화를 이뤄냈다.
이후 동생 구본준 부회장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줬지만 1년에 몇 차례는 직접 경기장을 찾았고, LG트윈스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구느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말에 동료들과 낚시와 골프를 즐기지만 '탐조(探鳥)'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고인은 집무실에 망원경을 두고 트윈타워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밤섬에 몰려드는 철새를 즐겨 감상했다고 한다.
소탈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예의를 잘 지켜 고인을 대해본 사람들은 인간미와 친근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시간관념이 철저해 정해진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얘기보다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슬하에 아들과 딸 둘을 뒀으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구광모 LG전자 B2B사업본부 정보디스플레이(ID) 사업부장을 2004년 양자로 입적해 경영 수업을 받도록 했다./연합뉴스
디스플레이·이차전지 세계 1위…마곡 LG사이언스파크로 R&D 새 지평
LG트윈스 창단 첫해 '우승신화' 이룬 '구느님'…아들 잃고 조카 입양
끈기와 결단의 리더, 야구를 사랑한 기업인, 양자를 후계자로 키운 총수.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전 회장과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에 이어 LG그룹의 '3세대 총수직'을 23년간 수행하며 LG전자와 LG화학 등 여러 글로벌 기업을 키워낸 고 구본무 회장에게 붙는 수식어들이다.연세대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해 애쉬랜드대학과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각각 경영학을 전공한 뒤 귀국, 1975년 ㈜럭키에 입사하는 것으로 기업 활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과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 등의 직위를 차례로 거치면서 럭키와 금성사의 기획조정실 등 그룹 내 주요 회사의 영업, 심사, 수출, 기획업무 등을 두루 섭렵하며 다양한 실무경력을 쌓았다.
특히 1985년 이후 그룹 기획조정실에서 전무와 부사장의 직책을 맡아 그룹경영 전반의 흐름을 익히는 기회를 가졌고, 1989년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경영 수업을 본격화했다.1989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회장에 선임돼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 네트워킹을 강화하며 경제 및 경영 전반에 대해 논의하거나 의견을 청취하는 등 대외 활동의 보폭을 넓혔다.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20년만인 1995년 그룹의 회장직을 승계받았다.
부친인 구자경 회장보다는 5년 늦은 50세에 그룹경영을 맡았지만 전 회장이 건강한 상태에서 승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는 게 재계의 평가였다.고인은 다양한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그룹 핵심 사업인 전기·전자와 화학 사업은 물론 통신서비스, 자동차부품, 디스플레이, 에너지, 바이오 등 신성장 사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거듭했다.
정도 경영, 가치창조형 일등주의, 도전주의와 시장선도 등을 경영 이념으로 삼았던 고인은 그룹 기술자문위원회와 해외사업추진위원회 등의 위원장 자격으로 LG그룹의 '기술개발력 제고'와 '세계화 추진' 등 제2의 경영혁신을 주도적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평소 '글로벌 경영에서는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 '신규 사업은 시작하면 반드시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매사에 '최고'를 추구하는 점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받는다.GS, LS, LIG, LF 등을 계열 분리하고도 매출은 30조원대(1994년 말)에서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이상, 해외 매출은 약 10조원에서 약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신장시키는 등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그룹 관계자는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면서 용기 있고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끝까지 도전해 결실을 보는 구 회장 특유의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이 힘을 발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LG디스플레이의 대형 올레드(OLED) 사업, LG화학의 이차전지 사업을 글로벌 1위로 이끌고, 최소 3년 걸릴 것이라던 LTE 투자를 9개월 만에 끝내고 이동통신 시장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도 이런 고인의 끈기와 결단이 근저에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럭키금성에서 'LG'로 CI를 변경하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등 기업문화를 과감하게 바꿔 놓은 것도 고인의 역할이 컸다.최근에는 서울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4조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사이언스파크'를 건립하며 LG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첨단 연구개발(R&D)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인은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LG트윈스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자율경영을 구단 운영에 접목해 '깨끗한 야구, 이기는 야구'를 표방, 창단 첫해인 1990년 시리즈에서 예상을 뒤엎고 우승하는 신화를 이뤄냈다.
이후 동생 구본준 부회장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줬지만 1년에 몇 차례는 직접 경기장을 찾았고, LG트윈스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구느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말에 동료들과 낚시와 골프를 즐기지만 '탐조(探鳥)'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고인은 집무실에 망원경을 두고 트윈타워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밤섬에 몰려드는 철새를 즐겨 감상했다고 한다.
소탈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예의를 잘 지켜 고인을 대해본 사람들은 인간미와 친근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시간관념이 철저해 정해진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얘기보다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슬하에 아들과 딸 둘을 뒀으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구광모 LG전자 B2B사업본부 정보디스플레이(ID) 사업부장을 2004년 양자로 입적해 경영 수업을 받도록 했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