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보다 약속장소 먼저 도착… 화담숲 찾은 사람들에 길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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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LG그룹 회장 타계“수고하십니다. 신문 잘 보고 있습니다.”
구본무 회장 소탈한 리더십
회사 행사때도 '소탈'
직원들과 같은 티셔츠 입고
격의 없이 다가가 음식 권해
새 150여종 구분할 정도로 조류학에도 조예 깊어
LG트윈스 구단주로 활동
팬들 사이에서 '구느님' 불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행사장에서 본지 기자와 마주칠 때마다 건넨 말이다. 수행비서도 없이 혼자 다닐 때가 많았다. 계열사 사장단을 우르르 몰고 다니던 다른 ‘회장님’들과는 사뭇 달랐다. 걸음걸이도 워낙 빨랐다. 옆에서 질문을 던지면 구 회장의 뒤통수를 본 채 대답을 듣기 일쑤였다. 그는 상의를 손에 든 채 셔츠를 걷어 올리고 일반 직장인처럼 다닐 때도 적지 않았다. 얼핏 보면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일 정도로 소탈한 행보였다.◆소탈하고 검소했던 고인
고인의 ‘마지막’도 소탈했던 그의 삶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최근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가족과 회사 임원들에게 수차례 ‘조용한 장례식’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이 “내 삶의 궤적대로 장례도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러달라. 나 때문에 번거로운 사람이 있으면 되겠느냐”는 말을 반복했다는 후문이다. 평소 삶의 방식을 죽음 이후에도 이어가길 원했던 것으로 읽힌다.
LG그룹은 20일 고인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고인의 유지와 유족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한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서울대병원에 빈소를 차렸지만 가족·친지를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조문을 받지 않기로 했다. 4대 그룹 회장임에도 3일장을 치르는 이유다.생전 그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잊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시간관념이 철저했다. 항상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상대방을 기다렸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한 대기업 임원이 당시 부장이던 구 회장과 함께 해외 출장을 갔는데, 귀국 후에야 자신과 동행한 사람이 LG그룹 회장의 맏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고인은 늘 LG 경영진에게 “자만을 경계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
‘검소함’도 고인을 상징하는 말 중에 하나다. 고인은 늘 그룹 경영진에게 자녀 등의 결혼식 때 가능하면 검소하게 치르도록 조언했다고 한다. 지난해 창립 70주년 때도 성대한 기념행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일부 임원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별도 행사 없이 시무식을 겸해 간소하게 치르면서 의미를 되새기자고 제안했다.
특유의 ‘소탈함’은 늘 재계의 화젯거리가 됐다. 그는 회장 취임 초 그룹 임직원들을 시상하는 행사에 직원들과 똑같이 행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차림으로 등장해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평소에도 수수한 옷차림 때문에 ‘회장님인지 몰랐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LG그룹의 한 임원은 “고인은 행사장에서 만난 학생들이나 직원에게 격의 없이 다가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라고 먼저 권하곤 했다”며 “자상하고 마음씨 따뜻한 회장이었다”고 회고했다.고인은 지난해 수술 후 경기 광주시 곤지암에 있는 화담숲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평소에도 업무가 없을 때면 달려가 나무를 돌보며 휴식을 취하고 경영 구상을 가다듬곤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도 그의 소탈한 행보는 이어졌다. 숲을 찾은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아이들에게 물병을 건네면서 산책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오너 리스크’ 없는 기업
소탈하고 검소했던 그의 삶 덕분에 LG그룹은 늘 ‘잡음 없는’ 기업으로 통했다. 지금도 그렇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LG는 국내에서 ‘오너 리스크’가 없는 몇 안 되는 기업”이라며 “생전 구 회장의 소탈하고 검소한 면모가 반영된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털털한 겉모습과 달리 특정 분야에 대한 그의 ‘집념’과 ‘집요함’은 강했다. 대표적 사례가 ‘탐조(探鳥)’다. 하늘을 나는 모습만 보고도 무려 150여 종의 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조류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집무실에 망원경을 두고 한강 밤섬에 몰려드는 철새를 즐겨 감상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 LG트윈빌딩에 둥지를 튼 천연기념물 황조롱이가 고인의 각별한 보살핌 덕분에 무사히 새끼를 낳은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야구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LG 트윈스 구단주로 활동하면서 자율경영을 구단 운영에 접목해 ‘깨끗한 야구, 이기는 야구’를 내세웠다. 창단 첫해인 1990년 시리즈에서 예상을 뒤엎고 우승 신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이후 동생 구본준 부회장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줬지만 해마다 몇 차례씩 직접 경기장을 찾았다. 팬들 사이에선 ‘구느님’으로 불릴 정도였다. LG 트윈스는 이날 고인을 추도하기 위해 서울 잠실 홈 경기에서 응원단을 운영하지 않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구 회장도 싫어하는 게 있었다고 한다. 준비하지 않는 불성실한 사람을 경멸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연습장에서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무작정 골프장에 나타나는 초보자를 싫어했다. 치열하고 완벽한 준비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얘기다. LG 계열사 사장들을 평가할 때도 이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는 후문이다.
장창민/고재연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