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비극적이며 상징적인"

65년 전엔 잘못된 휴전협정을 스스로 거부
이번 미·북 정상회담엔 우리 자리 아예 없어
그렇게 우리 운명을 남에게 맡긴 슬픈 현실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휴전 회담에 한국을 공식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 휴전 회담장을 취재한 조선일보 최병우 기자의 이 기사는 널리 알려졌다. 그는 회담장의 모습이 “너무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라고 썼다.

막상 기사를 다 읽고 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국제연합군 대표 윌리엄 해리슨과 북한군 대표 남일은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목례조차 하지 않았다. 협정서 36부에 서명하고 끝냈다. 이 살벌한 침묵 회담에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즉, 그날 그 자리는 한국인의 운명이 결정된 시공이 아니었다. 우리 운명은 다른 시공에서 이미 결정된 터였다. 어찌된 일인가?6·25전쟁의 휴전은 1951년 6월23일 공산주의 러시아의 부외상 야코프 말리크가 처음 제안했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실패하자, 공산주의 진영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6월30일엔 국제연합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가 방송으로 휴전 의사를 중공군 사령부에 밝혔다. 그렇게 해서, 현대에서 가장 오래 끌고 위험한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휴전 협상은 두 요인 때문에 늦어졌다. 하나는 공산군의 지연 전술이었다. 그들은 인명 손실이 많은 전쟁에선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여겼다. 다른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였다. 휴전은 공산군에 군대를 재건해서 다시 침공할 기회를 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미군은 성가신 그를 제거하려 시도했지만, 국민의 절대적 지지와 한국군의 충성을 받는 대통령을 감히 제거할 수 없었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공화당 후보는 ‘한국전쟁의 종결’을 공약으로 내걸어 이겼다. 당연히,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이 대통령과 맞부딪쳤다. 1953년 들어 협상이 빠르게 진행되자, 이 대통령은 걱정이 커졌다. 휴전이 돼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은 다시 위험해질 터였다. 중공군이야 언제라도 압록강을 넘어올 수 있지만, 미군은 태평양을 건너야 한다. 전쟁에 넌더리가 난 미국이 다시 군대를 보낸다는 보장도 없었다.그의 대응은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휴전 회담에서 가장 까다로운 논점은 포로들의 송환에서 본인의 의사를 따르는 일이었다. 국제연합군은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한국에 남겠다는 포로들은 송환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공산군은 그럴 경우 많은 포로가 한국에 남을 터이므로, 그런 원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우겼다. 이 대통령이 국군 헌병들을 동원해서 미군이 지키는 반공포로를 2만 명 넘게 석방하자, 온 세계가 경악했다. 이 대통령의 계산대로, 휴전 회담도 중단됐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사를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 뒤에야 이 대통령은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휴전이 어리석은 길이라는 신념을 바꿀 수는 없으니, 휴전 협정에 한국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해서, 해리슨과 남일이 판문점에서 협정서에 서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명한 12시간 뒤에 비로소 양측의 교전이 중지됐다. 다시 몇 시간 뒤 양측이 각기 사령부에서 최고사령관이 서명했다. 아군은 문산에 있는 국제연합군 전방 사령부에서 마크 클라크가 서명했다. 이 자리에 한국군 대표인 최덕신이 동석했지만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휴전협정서에서 한국군 사령관의 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은 그래서 뜻이 깊다. 그 빈자리는 휴전의 본질과 위험을 누구보다도 뚜렷이 인식한 지도자의 뜻을 증언한다. 그의 통찰이 옳았음을 역사는 거듭 보여줬다. 국제적으로 중요한 문서에서 빈자리가 이처럼 유창했던 적은 없다.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담이 열린다. 그 자리에 우리 대표는 없을 것 같다.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정상회담에 우리 지도자는 아예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65년 전엔 잘못된 협상을 우리 스스로 거부했다. 그 협상이 불러올 문제들은 이미 한·미동맹으로 대비한 터였다. 이번엔 협상이 불러올 엄청난 문제들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우리 운명을 남들에게 맡기게 됐다. 판문점 회담장을 취재하고 다섯 해 뒤 대만에서 순직한 전설적 저널리스트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란 표현이 뒤늦게 적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