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 절대빈곤 때나 통했을 정책"… "저소득층 더 힘들어져"
입력
수정
지면A6
'소득주도 성장' 이대로 좋은가‘소득주도 성장’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5월 출범하며 들고나온 핵심 경제정책이다. 최저임금을 올려 가계소득을 늘려주면 소비가 확대돼 투자가 늘고,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경제학계에선 “교과서에도 없는 이론이다. 정부가 검증되지 않은 이론으로 전례 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직 경제장관 10명의 긴급 정책 제언
진념 "기업인을 죄인 취급… 고용 줄이게 내몰고 있어"
최종찬 "재정보전은 한계… 고집 버리고 정책 선회를"
신제윤 "최저임금 인상은 저소득층간 소득만 이전"
윤증현 "노동 개혁 필요"
정부는 그럼에도 올해 최저임금을 16.4% 올리고, 영세사업주 부담은 정부 재정으로 보전해 주겠다며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결과는 사실상 실패라는 게 전직 경제 장관들의 판단이다. 전직 경제 장관 10명 중 9명은 27일 한국경제신문 설문에서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지금이라도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진보 정부 출신 5명 중 4명이 ‘반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경제 장관을 지냈던 인사 5명 중 진념·전윤철·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최종찬 전 건설교통부 장관 등 4명이 소득주도 성장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진 전 부총리는 “저소득층이 어려운 이유를 정부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는 것이 큰 위험”이라고 지적했다. 기업이 고용을 늘릴 수 있도록 도와 저소득층 임금을 올려야 하는데, 최저임금부터 급격히 인상하니 기업이 오히려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전 전 부총리는 소득주도 성장에 대해 “당장 먹고살 돈이 없어서 소비를 줄이는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절대빈곤 시절에는 소득주도 성장이 통했지만 지금은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돼 있고 소득이 늘어난다고 당장 소비를 확대할 수 없는 구조”라며 “엥겔지수(가계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가 낮아진 상황에서 소득주도 성장은 허상”이라고 강조했다.
최 전 장관은 “최저임금 인상분을 재정으로 보전한다는 것은 지속 불가능하다”며 “정부가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게 아니라 이제라도 용기 있게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한덕수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몇 가지 경기지표가 안 좋긴 하지만 절대적인 원인을 밝히기는 어렵고,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 유연성을 떨어뜨리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며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저소득층 더 힘들게 할 가능성 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일했던 장관(장관급 포함) 5명은 모두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반대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본말이 전도됐다”며 “이 때문에 소득과 분배도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지난 1분기 소득 하위 20%의 월평균 가계소득이 작년보다 8%나 줄어든 것을 지적한 것이다.
백용호 전 청와대 정책실장도 정부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다 오히려 저소득층을 힘들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성장한다고 해서 분배가 악화되는 것이 아닌데, 지금은 너무 성장보다 분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그러다 성장이 멈추면 없는 사람이 더 힘들어진다”고 지적했다.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구조적으로 소득주도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생산은 점점 더 해외에서 이뤄지고 외국인의 배당도 늘어난다”며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저소득층 간에 A에게 빼앗아 B에게 주는 식”이라고 말했다.
노동 개혁·서비스업 대형화해야
전직 장관들은 최저임금 인상 속도를 조절하고, 서비스산업 경쟁력 제고에 힘을 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백 전 실장은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영향이 없다고 자꾸 부인해선 안 된다”며 “현실을 인정하고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노대래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오히려 과거 최저임금 평균 인상률보다 낮은 수준이 적정하다”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은 “너무 근로자 편향적인 정책만 이어지고 있다”며 “노동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전직 장관들은 소득주도 성장을 대신할 정책 제언도 잊지 않았다. 전 전 부총리는 “의료, 교육 등 서비스업 대형화가 필요하다”고 했고, 신 전 위원장도 “서비스업 기득권 타파가 중요하다”고 주문했다.
김일규/임도원/김은정/성수영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