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J노믹스'와 '장마당 경제'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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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미국 경제 제칠 것"이라던 새뮤얼슨폴 새뮤얼슨 전 MIT 교수는 세계적 밀리언셀러인 《경제학 원론(Economics)》의 저자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지금은 망해버린 옛 소련이 “미국 경제를 추월할 것”이라고 몇 번씩이나 ‘뻥 예측’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미·소 냉전이 한창 진행되던 1961년 “소련 경제가 이르면 1984년, 늦어도 1997년에는 미국을 제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80년이 되자 ‘2002년과 2012년 사이’로 예언 실현 기간을 늦추긴 했지만 “소련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는 호언(豪言)을 멈추지 않았다. 소련은 2002년이 오기 훨씬 전인 1989년 공중 분해됐지만, 붕괴 석 달 전까지도 “소련과 같은 명령경제 국가도 번영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기업'의 존재에 무지해 남긴 '치명적 오점'
"마차를 이어 붙여도 기차가 되지는 않는다"
이학영 논설실장
그런 새뮤얼슨이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사실이 민망하다.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경제학 이론의 새 장(章)을 열었다”는 것이다. 소비·비용·생산이론 등 이전까지 말로 표현됐던 것들을 수식과 방정식을 활용해 간결한 모델로 만든 게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경제학의 수리화가 곧 과학화이며, 수리원리로 구성되지 않은 이론은 지적인 워밍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큰소리쳤던 새뮤얼슨이 ‘위대한 소련 경제의 세계 제패론’에 눈이 먼 것은 자업자득이었다.모든 것을 숫자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만이 ‘과학적이고 확실한 추론’이라고 믿은 사람에게 ‘무(無)에서 유(有)를 일궈내는 창발(創發) 조직’으로서의 기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새뮤얼슨은 미국보다 한발 앞서 유인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최강의 실용성능을 자랑한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개발한 소련의 눈부신 기술력이 모든 걸 말해준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소련에는 그런 기술을 ‘사회적 재화(財貨)로 전환시키는 장치’로서의 기업이 없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J노믹스(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에서 “새뮤얼슨의 그림자를 본다”는 사람들이 많다.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다양한 방법으로 높여 경제성장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을 비롯한 핵심 정책들에서 ‘기업’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제로(0)화, 최저임금 시간당 1만원 실현, 근로시간 강제 단축 조치의 당사자인 기업들이 정책 실행의 동반자가 아니라 복종하고 순응해야 할 ‘객체’로 다뤄지면서 빚어지는 부작용과 역풍은 이미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J노믹스’의 또 다른 축(軸)인 ‘혁신 성장’도 ‘중소벤처가 주도하는 창업’이 최우선적인 육성 대상일 뿐, 기존 기업들은 뒤로 밀려나 있다. 그런 터에 ‘공정 경제’를 위한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압박과 소액주주 권한 강화 조치까지 더해지고 있다. 경제 전체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먼저 그린 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정책 수립과 시행의 기본이라고 본다면, ‘문재인 정부에 기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북한 정권을 향해 “삼성과 LG를 보라”는 트위터 메시지를 날렸다. “그들이 이룬 업적은 믿기지 않을(incredible) 정도”라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나설 경우 한국처럼 경제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미 북한에서는 일상용품의 90%가 ‘장마당’으로 불리는 민간시장에서 거래될 정도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확산되는 터다. 하지만 북한 ‘장마당 경제’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기업이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경제의 도약을 위해 ‘삼성과 LG’가 필요하다고 말한 이유다.
“마차를 아무리 많이 이어 붙여도 기차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마차를 기차와 자동차로, 비행기와 우주선으로 도약시키는 장치는 ‘창발적 조직’인 기업이다. 새뮤얼슨은 그런 기업의 본질에 무지했기에 “경제학을 현실과 동떨어진 제2의 물리학으로 만들었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기업을 뒷전에 돌려놓은 ‘J노믹스’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