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사고 다발' 실버존·스쿨존… 보호받지 못하는 보호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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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보호구역 매년 늘었지만…1일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 오후 시간임에도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찬거리를 사러 나온 할머니부터 주차구역을 지키는 나이 지긋한 관리원까지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이었다. 번잡한 골목 안으로 오토바이 두세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인근 횡단보도에선 걸음이 느린 한 노인이 신호가 바뀐 뒤 차도 한가운데 갇히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노인보호구역(실버존)으로 지정돼 있지 않다. 시장이 노인들만 찾는 장소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이곳에서 지난 2년간 1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다쳤지만 달라진 건 없다.
노인 보행사고 많이 난 38곳 중
실버존 지정된 곳 1곳에 그쳐
요양원 등 일부지역 편중 지정 탓
'안전 사각' 스쿨존·장애인구역
스쿨존 CCTV 설치 2%에 불과
장애인보호구역은 서울에 6곳 뿐
선진국선 보행자 우선 정착
구역 상관없이 이면도로 전체를
제한속도 30㎞ 이내로 묶어야
교통사고 많아도 실버존 지정 안돼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보행 약자를 위해 설치 운영 중인 각종 보호구역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호구역은 해당 시설 주변 300~500m 내 지역을 지정할 수 있으며 △속도 제한(시속 30㎞ 이하) △주정차 및 추월 금지 등의 규제가 적용된다. 1995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을 시작으로 노인보호구역(2006년), 장애인보호구역(2010년)이 잇달아 도입됐다.
노인보호구역이 늘어나는 데(2013년 626곳→2017년 1299곳) 비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노인보호구역이 복지관 요양원 등 일부 시설에 몰리고 정작 전통시장 등 실제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것. 경동시장에서 20년 동안 일한 김모씨는 “값싼 식당 등이 있어 외지에서 오는 노인이 많아 교통사고가 잦은 편이지만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은 없다”고 전했다.행정안전부가 지난 1월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 다발지역 38곳을 점검한 결과 노인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한 곳에 불과했다. 38곳 중 6곳은 2014년과 2015년에도 사고 다발지역으로 조사됐으나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동안 노인사고 다발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던 서울 제기동 성바오로병원 주변도 지난달 30일에야 뒤늦게 지정됐다.
노인 교통사고는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노인 보행자 사망자 수는 지난해 906명으로 전년보다 40명(4.6%) 증가했다. 전체 보행자 사망(1675건)의 54.1%를 차지한다. 해외와 비교해도 높은 수준이다. 2015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 10만 명당 보행 중 사망자 수는 13.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많았다.
어린이에 비해 활동 반경이 넓은 노인의 행동 패턴을 고려할 때 한정된 시설보다는 확장된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교통 전문가는 “법 개정을 통해 보호구역을 관할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정할 수 있도록 했지만 어린이보호구역과 달리 노인보호구역은 설치 비용을 전액 지자체가 부담하는 방식이어서 구역을 넓히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과속방지턱도 없는 어린이보호구역
어린이보호구역의 안전도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5월 전북 군산의 초등학생 A군(10)은 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당시 사고 차량은 제한 속도인 시속 30㎞를 훌쩍 넘어 가로수까지 들이받은 뒤 전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속도 제한과 불법 주정차 등 기본적인 규제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전국 43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차량 1210대의 속도를 측정한 결과 468대(38.7%)가 시속 30㎞ 이상으로 주행했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91곳 중 46곳(50.5%)에서 불법 주정차 차량이 발견됐다.무인단속장비, 과속방지턱 등 안전시설 미흡이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전국 무인단속장비 설치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어린이보호구역 가운데 폐쇄회로TV(CCTV)가 설치된 곳은 336개(2%)에 그쳤다. 설재훈 한국교통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속도제한 표시판이나 노면표시에 그친 곳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어린이 보행자가 많은 학원 밀집지도 보호구역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2017년 전국에서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학원은 38곳(2%)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학원가인 서울 대치동 일대 골목도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없다.
서울에 단 6곳인 장애인보호구역은 경찰조차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경찰관은 “숫자도 많고 눈에 잘 띄는 어린이보호구역과 달리 노인·장애인보호구역은 관할서 경찰관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며 “학생은 등하교 시간을 중심으로 단속이 가능하지만 장애인·노인보호구역은 보행자 파악에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구역 상관없이 도심 제한속도 낮춰야”
전문가들은 보호구역 개선 방안으로 생활도로구역(30구역)을 제시하고 있다. 30구역은 차로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이면도로 전체를 ‘보행자 우선구역’으로 지정해 주행속도를 시속 30㎞ 이하로 묶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연령층에 한정된 보호구역으로는 사고를 예방하는 효과가 미흡하다는 판단 아래 2015년부터 새롭게 도입됐다. 경찰 차원의 ‘생활도로구역 추진 지침’에 따라 전국 645곳에 설치됐다.도심 내 차량 속도를 줄이는 것은 세계적인 움직임이다. 네덜란드(Zone 30), 영국(20mph Zone), 독일(Tempo 30) 등 유럽 선진국은 오래전부터 도심 차량 속도를 시속 30㎞ 이내로 제한해 왔다. 교통안전공단 실험에 따르면 시속 60㎞인 차와 충돌했을 때 중상을 당할 가능성은 92.6%였으나 50㎞일 때 72.7%, 30㎞ 때는 15.4%까지 급감했다. 오주석 도로교통공단 연구원은 “현행 보행약자 보호구역은 한계가 명확하다”며 “유연하게 적용 가능한 30구역을 통해 차가 아니라 보행자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