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길… 오이디푸스의 희생이 요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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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에 관한 가장 탁월한 작품이다. 기원전 429년, 아테네 시민 1만7000여 명이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디오니소스 엘류쎄레우스(Dionysus Eleuthereus·디오니소스 해방자)’란 이름의 원형 극장에 앉았다. 당시 아테네 시민은 7만~8만 명 정도. 총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셈이다. 시민들은 지붕이 없는 원형 야외극장에 만들어진 나무 의자 ‘이크리아(ikria)’에 좌정했다. 엘류쎄라이는 원래 아테네 북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는데, 주변 도시 테베의 지속적인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아테네에 편입됐다. 아테네에는 디오니시아(Dionysia)라는 종교의례가 있었다. 디오니시아는 원래 새로운 포도주 재배를 기념하는 농경축제였다. 아테네가 디오니소스 엘류쎄레우스 축제를 수용하면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학적이며 예술적인 장르를 더했다. 바로 서양문명의 모체인 그리스 비극경연과 공연이다.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4) 야만과 문명
오이디푸스 왕아테네 시민들은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비극을 감상할 것이다. 이 비극의 그리스 제목은 ‘오이디푸스 튀라노스(Oedipus tryannos)’다. ‘튀라노스’는 후에 ‘독재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둔갑했는데 이 당시에는 단순히 ‘통치자’란 의미였다. 그리스 비극에 관한 이론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이 작품의 이름을 단순히 ‘오이디푸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화와 전설은 아테네인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던 이야기다. 특히 38년 전인 기원전 467년, 소포클레스의 선배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디오니시아 비극경연에서 테베의 왕이며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가문에 관한 3부작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수들》로 우승했다. 이 중 마지막 작품인 《테베를 공격하는 일곱 장수들》만 남아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아이스킬로스 작품의 속편으로 오이디푸스란 인물에 집중했다. 소포클레스도 오이디푸스에 관한 비극 세 편을 남겼다. 《오이디푸스 왕》과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의 비극을 그린 《안티고네》다.
아테네 역병《오이디푸스 왕》의 배경을 이해하는 핵심은 ‘아테네 역병’이다. 오이디푸스는 ‘델피의 신탁’대로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역병을 창궐시킨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살해했다. 하지만 역병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 작품은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역병을 치유하기 위해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주인공은 그리스어로 ‘프로타고니스테스(protagonistes)’. 영어로는 ‘프러태거니스트(protagonist)’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가장 중요한’이란 의미를 지닌 ‘프로토스’와 ‘경쟁자’란 뜻을 가진 ‘아고니스테스’의 합성어다. 오이디푸스는 주인공으로서 자기 운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상상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는 자신의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 바로 자신과 경쟁하는 자다.
《오이디푸스 왕》이 상연되기 2년 전인 기원전 431년,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레폰네소스 동맹이 전쟁을 벌였다. 민주정을 신봉하는 아테네와 소수가 권력을 쥐는 과두정을 신봉하는 스파르타와의 체제 전쟁이었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의 승리가 눈앞에 왔지만, 중세시대 흑사병과 같은 규모의 전염병이 아테네를 강타했다. 아테네에 영광을 가져왔던 항구 ‘피레우스(Piraeus)’를 통해 전염병이 들어온 것이다. 그 후 기원전 429년과 427년에도 대규모 전염병이 퍼져 아테네 군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29년 디오니소스 원형 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왜 제우스는 이런 역병을 아테네에 내렸는가. 그는 그 이유를 오이디푸스란 신화적인 인물을 통해 찾기 시작한다.
오이디푸스그리스 비극에서 오이디푸스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은 없다. 그는 이성을 겸비한 통치자이며, 테베 도시 입구를 지키는 무시무시한 괴물 스핑크스를 물리친 영웅이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대답하지 못한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가 역설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자신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알지 못한다. 즉, 자신에게 짐승과는 다른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오이디푸스의 태생은 그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경험하고 습득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명 규범들을 비참하게 파괴했다. 부모는 아들 오이디푸스를 야만적이며 위험한 산지에 버렸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로 상징되는 인물을 통해 보호받고, 어머니로 상징되는 인물을 통해 양육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이를 버리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한 도시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의 첫 아들이 오이디푸스처럼 유기된 사례는 없었다. 고대 아카드 왕국의 창시자 사르고이나 히브리 민족의 구원자 모세가 이런 방식으로 버려졌지만, 그들은 민족의 영웅이지 비극의 주인공은 아니다. 오이디푸스는 문명과 문화의 최소 단위인 ‘집’을 상실하고 무질서와 혼돈, 야생의 상징인 ‘야산(野山)’의 아들로 그리고 ‘우연(偶然)’의 아들로 태어난다. 산지의 목동에 의해 목숨을 건진 오이디푸스는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자란다. 그에겐 가장 미천한 인간이라도 당연히 소유하게 되는 집과 이름 그리고 부모가 없다.
다른 인간과 구별해 오이디푸스에게 정체성을 준 유일한 것은 ‘퉁퉁 부은 다리’다. 심하게 부은 다리는 그를 문명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다른 인간들과는 섞일 수 없게 만든 ‘괴상한 존재’의 상징이다. 가정과 도시로부터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규범 두 가지를 어겼다. 첫 번째는 친부살해(親父殺害), 두 번째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이다. 이 두 가지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터부다.‘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발이 퉁퉁 부은’이란 의미이기도 하고, ‘발(푸스)을 아는 자(오이디)’란 뜻도 지닌다. 이 어원은 “어느 동물이 한 목소리를 지니면서도 네 발로 걸었다가, 두 발로 걷고, 그 후에 세 발로 걷느냐”는 스핑크스의 질문을 연상케 한다. 인간은 어릴 때 네 발로 걷고, 청년이 되면 두 발로 걷고, 나이가 들면 지팡이를 짚으며 세 발로 걷는다. 오이디푸스는 이 수수께끼를 말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실제로 보여준다. 그는 발이 묶인 채로 태어나 어릴 때 다른 아이들보다 오랫동안 네 발로 걸어 다녔고, 자기 운명의 비밀을 찾기 위해 젊은 시절 두 발로 우뚝 서서 테베의 왕으로 통치했으며,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알고서는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상하게 해 말년에 지팡이를 짚고 세 발로 걸어 다녔다. 그는 이성적이며 동시에 비이성적이다. 그는 친절하면서도 난폭하고, 자비로우면서도 잔인하다. 오이디푸스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양면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는 테베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면서도 테베의 안녕을 위해 제물로 바쳐져야 할 ‘파르마코스(pharmakos)’ 즉 ‘희생양’이다.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도시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입하기 위해 걷어내야 할 통과의례다.
본성
소포클레스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나선다. 아테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가 아테네 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이디푸스라는 비극적인 인물을 통해 한 시민의 개선이나 혁신이 얼마나 힘든가를 무대 위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는 묻는다.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의 추상적인 체계인 문화는 자신이 속한 환경, 즉 가정이나 사회에 의해 결정되는가? 그 사람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이른바 ‘천성(天性)인가, 양육(養育)인가’는 인류의 오래된 질문이다.위대한 문학작품들이 다 그렇듯 《오이디푸스 왕》의 첫 구절은 소포클레스가 표현하려는 주제가 함축돼 있다. 오이디푸스는 도시에 들이닥친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러 온 테베 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자녀들아! 태고의 카드모스에서 새롭게 양육된 자들이여!” 오이디푸스는 왜 귀족들을 ‘자녀들’이라고 불렀을까. 소포클레스는 왜 테베라는 도시 이름 대신에 ‘카드모스’라는 오래된 이름을 사용했을까. ‘새롭게 양육됐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음 회에서 그 의미의 실타래가 서서히 풀려질 것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