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데스크 시각] '법에 의한 지배'라는 유혹

백광엽 지식사회부장
‘법의 지배’는 ‘입헌정치의 시발점’으로 일컬어지는 영국 대헌장(1215년)에 처음 등장했다. 대헌장은 ‘절대권력인 국왕도 법에 구속돼야 한다’는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500여 년간 ‘법의 지배’라는 대장정은 더디기만 했다.

사람들이 ‘법이 지배하는 세상’을 본격적으로 꿈꾸기 시작한 건 18세기 들어서부터다. 미국 작가 토머스 페인은 ‘자유국가에서는 법 외에는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고 갈파했다. 이런 생각을 담아 1776년에 펴낸 그의 저서 《상식》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점차 각성된 많은 이들이 ‘법의 지배’를 상식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그 지난한 투쟁을 거쳐 지금 우리는 ‘법의 지배’에 대한 위협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시대를 맞았다.기본권·헌법 존중해야 '법치'

유념할 것은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 사이의 큰 간극이다. ‘법에 의한 지배’는 법률에 근거한 행정을 일컫는 단순한 의미다. 어느 나라나 ‘법에 의한 지배’를 표방한다. 시진핑의 중국조차 ‘의법치국(依法治國)’이 슬로건이다. 문제는 이때의 법이 종종 통치자의 의지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뉘른베르크법에 근거해 유대인의 공무담임권을 박탈하고 홀로코스트라는 문을 연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법의 지배’는 침해돼선 안 되는 자연권과, 훼손돼선 안 되는 헌법적 가치를 인정하는 고차원의 통치 방식이다. 이 자연권과 헌법적 가치는 ‘공화 정신’으로도 불린다. 기본권과 인권의 보장, 민주적 시장경제, 자유통일 지향 등이 21세기 한국의 공화정신일 것이다. 광장의 횃불도, 통치자의 독선도 이 공화적 가치에 범접하지 못할 때 민주공화국은 완성된다.문재인 정부의 1년여에 걸친 질주는 ‘법의 지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여러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스스로를 선, 상대를 악으로 규정한 뒤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행태에서 ‘법에 의한 지배’의 전형을 읽을 수 있어서다. 친정부 인사가 압도적인 여러 위원회에서 형식 요건만 꿰맞춘 설익은 정책이 쏟아지는 점도 엄정한 법치에서의 궤도 이탈이다.

법치가 끝나면 폭정이 온다

불공정을 벌해야 할 경찰과 검찰은 스스로 불공정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5개월 수사로도 윤곽조차 못 잡은 드루킹 사건이 증거다. 핵심 연루자들이 거짓말과 모르쇠로 일관하는데도 제대로 소환되지 않고 있다. ‘차기 경찰청장 1순위’인 이주민 서울경찰청장과 ‘또 한 명의 검찰총장’이라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부실 수사의 책임자라는 점이 실망을 더한다. 그러면서도 찍은 기업은 탈탈 털고야 마는 가혹함에 기업들은 복지부동이다.법의 타락은 청와대가 주도하고 있다. 청와대는 이희호 여사 경호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선적 행태를 노출했다. 경호기간이 끝났다는 판단에 의원들이 연장안을 발의했는데도, 법제처를 다그쳐 유리한 해석을 받아내 국회 입법권을 무력화시켰다.

사법부에 대한 개입도 공공연하다. 특정 판사에 대한 오도된 시중 여론을 사법부에 여과 없이 전달해 법관과 재판의 독립성을 심대하게 위협했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청와대는 ‘그게 왜 잘못이냐’며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법의 지배는 때로는 번거롭다. 자유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제한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지급해야 할 불가피한 대가다. 로마 공화정을 꽃피운 키케로의 말처럼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법의 노예가 돼야 한다. ‘법이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던 존 로크의 300년 전 경구는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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