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춘호의 글로벌 Edge] 바둑 대신 체스판 뛰어든 시진핑

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 외교정책의 구루다. 70년 동안 중국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과 교감을 나눈 인물이다. 미·중 관계의 처음을 열었고 계속 넓혀 가는 작업도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도 자주 만나 현안을 교환한다. 중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2011년에 발간한 《중국 이야기(On China)》에 담겨 있다. 그는 여기에서 체스와 바둑을 빗대 미국과 중국 간 외교정책의 차이를 설명한다.

체스는 왕을 공격해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임이다. 바둑은 바둑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차지하는 면적의 비교 우위를 따진다. 체스는 쉽사리 판가름 나는 전투를 하지만 바둑은 쉽게 끝나지 않는 작전의 게임이기도 하다.트럼프도 시진핑도 밀어붙이기 공세

군사전략가 칼 폰 크라우제비츠가 체스에서 ‘힘의 중심’과 ‘결정적 공격 목표’를 배웠다면 중국 정치인들은 바둑에서 ‘전략적 포위’와 ‘세의 유불리’를 배워왔다. 중국 외교정책의 핵심인 이이제이(以夷制夷)나 도광양회는 이런 바둑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키신저는 “국제 정치에 영원한 적은 없다”며 현실주의 실리주의 노선을 지지한다. 그의 대중 외교정책이 트럼프에게 전달됐을 것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금 대중 통상정책에서 체스식 강공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5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25% 고율 관세를 물리겠다고 하고 중국 기업의 미국 투자도 제한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 통신 기업의 미국 진출도 허가하지 않았다. 외양이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밀어붙이기 전략이다. 게임 초반에 졸을 하나 따내면 형세가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급기야 중국도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이전과 다르게 매우 강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21일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 “유럽에선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는다고 하지만 중국의 문화 속에는 ‘이에는 이(以牙還牙·이아환아)’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시진핑이 대놓고 미국에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단어를 내놓은 것 자체가 미국 기업인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으로 다가온다. 당장 백악관에 가서 트럼프에게 대중 공세를 멈추도록 로비하라는 엄포로도 해석된다. 중국인들에게도 깜짝 놀랄 만한 시그널이다. 중국 민심을 다잡으려는 내부용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勢유불리 따지는 바둑전략 힘 잃어시진핑은 지난 27일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거침없이 불만을 쏟아부었다. 그는 “선조가 물려준 영토를 한 치도 잃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물건은 한 푼도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통적인 접근 방식과 완연한 차이가 난다. 키신저가 생각하는 미·중의 외교정책과 질서는 온데간데없다. 트럼프도 시진핑도 체스식 밀어붙이기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30년 전 일본과의 자동차·반도체 협상 때와도 다르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경제력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고 양국은 안보 동맹으로 연결돼 있었다. 미국 소비자들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미국만큼 성장했다. 군사나 정보기술(IT)에서도 미국과 겨루고 있다. 경제의 패권을 쥐려는 21세기 ‘신냉전시대’ 와중에 있다. 앞으로 미·중 간 견제와 마찰이 반복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고 군사 충돌로 갈 것이라는 예상도 제기된다. 장기적으로는 독재와 민주주의의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수출 기업들만 더욱 곤혹스럽다.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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