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베네수엘라의 눈물

국가부도 상태 처한 南美 산유국 베네수엘라
노골적인 퍼주기에다 反시장 정책 밀어붙인 탓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하는 이유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경제학 yjlee@khu.ac.kr >
2001년 크리스마스를 1주일 앞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여느 해 같았으면 축제 분위기였을 이곳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슈퍼마켓을 습격한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한 게 발단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튿날 신문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데 그쳤을 사건이었지만, 이날의 발포는 가스가 가득 찬 방에 성냥불을 그어 댄 것처럼 오랜 경제적 어려움으로 누적된 시민들 불만을 일시에 폭발시켰다. 이튿날 폭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페르난도 델라루아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11일 동안 다섯 명의 대통령이 줄줄이 사퇴하는 극도의 혼란상이 빚어졌다.

아르헨티나 위기는 2001년이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1960년대 이래 크고 작은 위기가 간헐적으로 불거졌다. 2014년에 이어 올해도 통화 폭락과 국가부도 사태에 내몰려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구조를 요청한 상태다. 온화한 기후, 기름진 땅, 풍부한 자원…. 그야말로 천혜의 땅이 아르헨티나다. 당연히 20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 나라였다. 그랬던 아르헨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아르헨티나만이 아니다. 세계 제1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며 ‘가난할 수 없는 나라’로 불린 베네수엘라도 2015년부터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국가부도 상태로 수입이 불가능해지면서 석유를 제외한 생필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올해 인플레이션이 1만4000%에 육박할 것이란 게 IMF의 전망이다. 이러니 한 달 월급으로 하루치 먹거리를 사기도 어렵다. 그나마 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이웃 콜롬비아와 브라질로 식료품과 의약품을 찾아 국경을 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 해외로의 탈출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무엇이 베네수엘라를 이렇게 망가뜨렸을까.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의 공통점은 포퓰리즘이다. 아르헨티나는 후안 도밍고 페론이 죽은 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재정 상태를 무시한 채 분배를 앞세웠던 페론주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정통적 경제 개혁이 시도된 적이 있지만 2001년 위기 이후 포퓰리즘의 유혹은 더욱 강해졌다. 키르히너 부부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이 파국을 맞은 2014년 국가부도 사태로 마침내 시장주의자인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집권했으나 적폐를 청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베네수엘라 위기는 2000년부터 2013년 사망 때까지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펼친 ‘차비스모(차베스식 포퓰리즘)’의 직접적인 유산이다. 차베스는 석유 기업들을 국유화해 노골적인 분배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석유 판매로 벌어들인 돈을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등 포퓰리즘 정책에 쏟아부었다. 동시에 설탕이나 식용유, 휴지 같은 생활필수품 가격을 강력하게 억제했다. 반(反)시장적인 물가 억제 정책은 기업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고, 결국 많은 업체가 생산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고유가 시절에는 수입으로 줄어든 국내 생산을 메울 수 있었다.하지만 니콜라스 마두로가 집권한 후 석유 가격 하락으로 이런 정책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됐다. 국가 재정은 파탄 나고 정부는 돈을 찍어내 재정적자를 메움으로써 인플레이션에 불을 댕겼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10년 넘게 공짜에 익숙해진 국민들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은 야당마저 휴지 조각이 된 자국 통화 대신 달러로 최저임금을 올려주겠다는 식의 공약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포퓰리즘은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고 인플레이션과 적자 재정의 위험, 외부적 제약, 반시장적 정책에 대한 경제 주체들 반응은 무시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 경험은 경제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채 지나치게 분배 위주 정책과 제도를 채택하고 나면 이를 뒤집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의 시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점점 더 많은 시혜를 요구한다. 어떤 경제 실적도 이런 요구를 장기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결국 재정 파탄을 맞는다. 적자 재정으로 이를 충당하면 다른 투자가 밀려나고 통화를 발행해 이를 메울 경우 인플레이션이 뒤따른다. 포퓰리즘의 덫이 치명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