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그로브몰의 '유쾌한 동거'… 쇠락하던 전통시장 살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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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신유통혁명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전통시장 파머스마켓 입구에는 ‘3번가와 페어팩스 애비뉴 모퉁이에서 만나요(Meet me at third and Fairfax)’라고 쓰인 조형물이 있다. LA 시민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파머스마켓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다는 걸 보여주는 문구다.
(3) 상생·성장 '두토끼' 잡은 복합쇼핑몰
"시장의 오랜 역사·문화 보존"
지역 상인과 쇼핑몰 개발 논의
쇼핑몰-시장 간 차량 운영도
한때 망할뻔한 파머스마켓
'야외 피크닉' 공간으로 바뀌자
가게 입점 늘고 관광객도 북적
개장한 지 84년 된 파머스마켓은 9만2900㎥ 넓이 복합쇼핑몰 ‘더 그로브’와 붙어있다. 대형 백화점 2개와 유명 브랜드 플래그십 매장, 체인 레스토랑 등이 시장 옆에 들어섰다. 전통시장 반경 1㎞ 이내 대형 유통업체 출점이 금지된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미국 도시부동산 연구단체인 ULI(Urban Land Institute)는 보고서에서 파머스마켓과 더 그로브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LA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복합쇼핑몰이 전통시장 영업을 어렵게 한다는 일부 인식을 뒤집는 사례다.“낙후된 전통시장 살려라”
파머스마켓은 1934년 석유 시추지였던 공터에서 농부들이 트럭에 농산물을 싣고 와 팔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지역 주부들이 찾아오면서 시장이 번창하자 땅 소유주인 길모어 가문은 같은 해 목조 건물로 상가를 지어 파머스마켓을 정식 개장했다. 1952년 시장 근처에 CBS 방송국이 들어서면서 이곳을 찾는 발길이 더 늘었다.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도 파머스마켓 단골이었다. 미국 밴드 비치보이스의 노래 가사에도 이 시장이 등장한다.
여느 전통시장처럼 이곳도 1980년대 중반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전통시장 대신 월마트 등 쇼핑하기 편하고 쾌적한 대형마트로 향하고 있었다. 길모어 가문은 파머스마켓을 허무는 방안을 검토하기까지 했다. 전통시장을 지키면서도 방문객을 늘릴 수 있는 대책이 필요했다. 부동산 개발사 여러 곳이 개발계획을 제시했다. 이후 1998년 길모어 가문과 부동산 개발사 카루소가 협업해 공사비 1억달러 규모 복합쇼핑몰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길모어 가문 부지를 카루소가 장기 임차해 쇼핑몰을 운영하는 형태였다. 개발 계획이 나오자 전통시장의 역사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일부는 교통체증을 걱정하기도 했다.
LA시는 복합쇼핑몰이 교통체증과 스모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교통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복합쇼핑몰 개발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복합쇼핑몰이 지역경제에 가져다줄 과실이 더 크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쇼핑몰이 들어서는 페어팩스 구역 도로를 넓히고, 민간 부지에도 새롭게 도로를 깔면 교통체증을 완화할 수 있다는 대안까지 내놨다.
쇼핑몰이 소비자 발길 되돌려시장 상인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카루소가 “파머스마켓의 역사 문화 가치를 보전하고, 파머스마켓 정신을 이어받아 야외공간을 디자인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카루소는 주민들과 회의를 열어 주민들의 의견도 개발계획에 반영했다. 주민들이 오가며 이용할 수 있는 서점, 은행 등의 시설을 들이기로 했다.
2002년 문을 연 더 그로브는 경쟁업체인 베벌리힐스 타운 등 쇼핑센터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다른 복합쇼핑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 덕에 인기를 끌며 세계적 관광지가 됐다. 쇼핑몰 가까이 전통시장이 있어 신선한 지역 농·축산물과 장인들의 수공예품, 향토음식점 등 특색 있는 콘텐츠를 갖춰서였다. 개장 첫해 더 그로브 매출은 당초 목표보다 제곱피트(0.09㎥)당 500달러씩 더 나왔다. 상가 공실률은 0%를 유지하고 있다.
파머스마켓도 더 그로브 덕을 봤다. 더 그로브가 쇼핑몰에서 시장까지 이동하는 차량을 운영하면서 쇼핑몰 방문객들이 자연스레 파머스마켓까지 둘러보게 된 것. 1990년대 후반 600만 명이었던 파머스마켓 연간 방문객 수는 더 그로브가 개장한 뒤 1800만 명으로 늘었다.시장 규모 역시 커졌다. 34곳이었던 파머스마켓 입점 가게 수는 100곳 이상으로 증가했다. 파머스마켓의 한 상인은 “과거 주말 점심시간대에만 방문객이 몰렸지만 쇼핑몰이 생긴 뒤로 저녁에도 사람이 많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LA)=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