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정세균 前 국회의장 "선거벽보 보고 키운 '국회의원 꿈'… 어느새 6선까지 쉼없이 달려왔죠"

"국회, 무슨 일 있어도 멈춰선 안돼…'국민들 회초리' 아직 안 끝나"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전북 진안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단골’ 전라도 토속 음식점이지만 정작 궁핍한 집안 사정 탓에 맛보지 못했던 진수성찬이었다.

빈농(貧農)의 자식이었지만 꿈은 남달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동네 담벼락에 붙어 있던 선거 벽보를 바라보며 국회의원을 꿈꿨다. 구름처럼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던 그의 꿈은 어느새 초선, 재선 의원을 거쳐 6선의 국회의장까지 다다랐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의결 등 파란 많은 2년 임기를 마친 그는 “6·13 지방선거 지원 유세까지 숨가쁜 일정을 마치고 이제 한숨 돌리게 됐다”며 막걸리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얘기를 털어놨다.초등학생 때부터 정치인이 꿈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마친 정세균 전 의장이 식탁에 마주 앉아 뱉은 첫 마디는 “이제야 훨훨 날아갈 것 같다”였다. 대통령 탄핵을 의결했던 무거운 의사봉을 내려놓은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좀 쉬셨느냐”고 묻자 “일하는 팔자라 못 쉬었다”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우리나라 의전 서열 2위 국회의장직을 마치자마자 전국을 돌며 지방선거 지원유세를 펼쳤다. 특히 자신의 지역구 시의원으로 나선 정치 신인을 발벗고 도왔다. 정 전 의장은 “종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한 보좌관을 돕기 위해 출근길 경복궁역 평창동 등을 찾아 직접 명함을 돌렸다”고 했다. 국회의원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인 의장직을 마치고 제일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셈이다.

정 전 의장은 떨어진 기력을 회복하려는 듯 몸보신에 으뜸이라는 ‘낙지꾸리’를 한 입 가득 넣고 음미했다. 낙지호롱이라고도 불리는 이 음식은 살이 한껏 오른 낙지를 꼬챙이에 끼워 약한 불에 구워낸 ‘신안촌’의 별미다. 정 전 의장은 전라도 음식이 당길 때면 경찰청 뒤에서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을 찾는다. 네 차례 국회의원을 만들어준 자신의 정치 텃밭(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군)을 포기하고 험지(종로구)에 출마해 당선된 그의 지역구에 있는 식당이기도 하다.특히 신안촌은 정치인 정세균의 시작과 맞닿아 있다. 정 전 의장을 정계에 입문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다. 쌍용그룹 상무로 일하던 정 전 의장은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제안으로 그의 특별보좌관을 맡아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뎠다.

잘 삭힌 홍어와 두툼한 돼지고기 수육을 묵은지와 함께 싸 든 정 전 의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국회의원이 꿈이었다”고 했다. 동네 벽에 있던 선거 벽보를 보고 꿈을 키웠다. 그는 “가정 형편 탓에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 배고픈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꿈을 접진 않았다”고 했다. “전주신흥고 시절에는 학비가 없어 매점에서 빵을 팔았고, 대학에 입학한 지 3일 만에 입주 과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을 만큼 힘든 시절이었죠.”

“나는 에스컬레이터형 정치인”정 전 의장은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계에서 그의 별명은 ‘미스터 스마일’로 통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해서다. 제철인 병어를 큼직하게 썰어놓은 병어회 한 접시를 직접 들고 온 이금심 신안촌 대표는 “의장님은 항상 웃고 계셔서 보는 저희도 절로 웃게 된다”고 거들었다. 정 전 의장은 “우리 집안 5대조 어르신이 호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내셔서 동네에서 제일 양반 집안으로 꼽혔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고 예의를 지키도록 교육받았다”며 “배고픈데 품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반발심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 배운 습관이 아직도 배어 있다”고 했다.

특유의 성격 탓에 정계에 그의 인맥은 두텁다. 눈에 드러나는 ‘정세균계’는 없지만 ‘정세균을 따라다니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따르는 이가 많다. 그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더라도 부끄러운 짓은 안 한다는 정치 신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본인을 에스컬레이터형 정치인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번에 올라가는 정치 인생이 아니라 한 단계씩 밟아서 성장했다는 의미에서다.

정계 입문 이후 15대부터 18대까지 차근차근 선수(選數)를 쌓았다. 19대 총선에서는 중진으로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험지 종로구를 택했다. 홍사덕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5선을 달았다. 20대 총선 때는 여권 잠룡으로 불리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눌러 6선 고지에 오르며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온화한 이미지와 원만한 대인관계라는 그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결과다.

미스터 스마일에게도 국회의장으로 보낸 지난 2년은 쉽게 웃을 수 없을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2016년 12월9일 오후 4시10분, 그가 쥔 의사봉을 통해 탄핵이 최종 확인됐다. 정 전 의장은 “대통령 탄핵은 20대 전반기 국회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헌정사상 초유의 국가위기 상황에서도 우리 국회는 헌법이 정한 절차와 규정에 따라 탄핵안을 처리했다”며 “우리 국회가 들불처럼 일어선 민심을 헤아린 결과이자 입법부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재확인한 계기”라고 설명했다.

무산된 개헌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그는 “개헌을 못한 게 통한”이라며 “자유한국당이 개헌이 모든 이슈를 잡아먹는 블랙홀이 될까봐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지만 아직 진행형”이라고 강조했다. 청소노동자를 비롯한 용역직 직원을 국회직으로 전환했을 때를 제일 뿌듯한 순간으로 꼽기도 했다. 정 전 의장은 “작은 일 같지만 이전 의장들이 다 약속했다가 기획재정부의 반대로 무산됐었다”며 “이번에도 반대하길래 연말 예산안 심의 기간에 경제부총리와 마지막 날 만나 담판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비화를 설명했다.

“지역구서 악수만 하는 의원은 자격 없어”

스스로 의회주의자임을 자부하는 정 전 의장은 “정치 발전을 위해 쓴소리는 하는 품격 있는 정치인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여당에도 잔소리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후배 정치인들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지역구에 가서 악수만 하는 의원’은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9400여 건에 달하는 법안이 국회가 열리지 못해 계류 중인 상황을 비판한 것. 정 전 의장은 “국회의장을 하면서 아무리 법안을 처리하라고 독려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며 “의석 수만 믿고 그러는 거라면 여당 의원들도 문제가 크다”고 지적했다. 웃음기 가득한 그의 얼굴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할 때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그는 “주중에는 법안을 처리하고 지역구 관리는 주말에 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발의만 해놓고 심의를 안 하고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면 뭐하러 법안을 제안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막걸리로 한 차례 목을 축인 그는 후반기 국회라도 정상적으로 일을 하려면 원(院)구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정 전 의장은 “원구성을 빨리 하라는 게 국민 뜻이면 자신의 뜻을 굽히고 따라야 한다”며 “국회를 빨리 정상화시키는 것, 그것부터가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방법”이라고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정당의 패배까지 아직 국민의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분석도 내놨다. 그는 선거를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로 구분했다. 통상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는 과거를 심판하는 회고적 투표가, 대통령 선거는 누가 미래를 이끌 적임자인지를 판단하는 전망적 투표가 주를 이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번 6·13 지방선거는 두 가지 경향이 혼재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박근혜 정부가 4년 동안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다는 국민의 심판이 이뤄졌고,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등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향후 기대감이 모두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해 판갈이가 이뤄졌습니다.”

승리에 취하지 말고 더욱 고삐를 조여야 한다는 경계심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정치란 산에 있는 덤불처럼, 올해 다 쳐내더라도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자라나는 것”이라고 했다. 지방선거에 완패한 보수 정당 역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PK(부산·경남) 지역의 판세 변화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했다. “원래 PK는 민주화 세력이 강고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3당 합당을 하면서 지역주의가 굳어졌고, 다시 (지역주의가) 깨지는 데 꼬박 30년이 걸렸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 아무리 깊은 골도 다 복원됩니다.”

국회의장 어떤 자리인가?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 통상 원내 1당서 선출

대한민국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수장으로 국회를 대표해 본회의를 주재하고 사무를 총괄한다. 통상 원내에서 의석 수가 가장 많은 정당에서 선출하며, 국회 재적의원 과반 득표로 당선된다.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함께 5부 요인으로 꼽힌다. 임기는 2년이다. 연임은 가능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연임하지 않는 게 관례다. 임기 중에는 당적을 가질 수 없다. 의장이 사고를 당한 경우 의장이 지정한 부의장이 직무를 대리한다. 국회의장은 심의 기간에 처리되지 않은 법안을 곧장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에 부칠 수 있는 ‘직권상정’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1950년 전북 진안 출생
△1969년 전주신흥고 졸업
△1975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총학생회장)
△1978년 쌍용그룹 입사
△1990년 미국 페퍼다인대학원 경영학 석사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 특별보좌관
△1996년~ 15~18대(전북 무주·진안·장수), 19~20대(서울 종로) 국회의원(6선)
△2003~2004년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의장
△2005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2006~2007년 산업자원부 장관
△2008~2010년 민주당 대표
△2012년 18대 대선 문재인 캠프 상임고문
△2016~2018년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정세균 前의장의 단골집 신안촌
남도식 전통 홍어삼합·낙지꾸리… 정치인들 즐겨 찾아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뒤 좁은 골목을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아담한 한옥풍 음식점 ‘신안촌’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치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이곳의 명물은 ‘홍어삼합’이다. 두툼한 돼지고기에 삭힌 홍어, 1년 정도 숙성한 묵은지를 한 점씩 올려 입에 넣으면 톡 쏘는 홍어 특유의 풍미에 코가 찌릿해진다. 나무 꼬챙이에 산낙지를 돌돌 감아 참기름과 간장을 살짝 발라 불에 구운 ‘낙지꾸리’도 별미다. 신안촌이 자랑하는 음식 중에는 ‘병어구이’도 있다. 칼집을 넣고 소금을 살짝 뿌린 병어를 달군 석쇠에 얹어 구운 다음 실파와 실고추를 얹어 내놓는다. 도라지무침, 묵은지, 가지찜 등 정갈하고 깔끔한 밑반찬도 정평이 나 있다.신안촌은 매일 아침 목포 수협에서 팔딱거리는 생선을 가져와 철저히 남도식으로 요리해 내놓는다. 메뉴는 낙지꾸리, 생선회, 홍어삼합 등이 나오는 특코스(6만6000원, 4인 이상 주문)와 가지찜, 낙지호롱, 생선전으로 구성한 점심정식(2만5000원)이 있다. 단품으로 맛볼 수 있는 병어구이(5만원), 낙지 연포탕(1만5000원), 홍어된장국(2만3000원) 등도 있다. 이금심 대표는 “잘 먹고 건강해야 일도 잘할 수 있다”며 “값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자리가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재원/배정철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