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건강염려증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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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아르기닌, 밀크시슬, 링거워터…. 요즘 홈쇼핑 온라인몰 등에서 대박 난 건강기능식품들이다. 아르기닌은 근육량 증대, 복부지방 연소, 생식능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운동 보조제다. 밀크시슬은 간(肝)독성 제거 효과가 있는 약용식물 ‘흰무늬 엉겅퀴’이고, 링거워터는 숙취해소용 마시는 링거액이다.
유난히 건강에 민감한 한국인은 몸에 좋다는 것이면 물불 안 가린다. 방송을 한번 타면 곧바로 품귀다. 하지만 과잉 섭취로 부작용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른바 슈퍼푸드 붐도 여전하다. 한때 아사이베리, 마카다미아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브라질너트와 사차인치가 휩쓴다. 업체들 광고만 보면 누구나 곧 ‘슈퍼맨’이 될 것 같다.이런 현상을 의료계에선 ‘건강염려증’과 연관지어 해석한다. 건강염려증이란 사소한 신체적 증세나 감각을 심각한 질병으로 확신해 두려워하는 증상이다. 기침이 잦으면 스스로 폐렴으로 오인하는 식이다. 공식 병명은 ‘건강 불안장애’, 한의학에선 심기증(心氣症)이다. 영어로 건강염려증은 ‘hypochondria’로, 어원이 갈비뼈 밑, 즉 복부다.
건강염려증의 원인은 과도한 질병 공포, 신경계통의 민감성, 내성 부족 등이다. TV 인터넷에 쏟아지는 검증되지 않은 의학정보 홍수 속에 ‘아는 게 병’이 된다. 병원을 순례하는 ‘의료쇼핑’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인구의 4~5%, 병원을 찾는 환자의 15%가 건강염려증으로 추정된다. 성별, 연령, 지역 구분없이 고루 분포한다. 건강염려증이 6개월 이상 지속돼 정식 진단을 받은 사람도 3871명(2016년)에 이른다.
한국인이 얼마나 건강에 신경쓰는지는 그제 발표된 ‘OECD 보건통계 2018’에서 새삼 확인됐다. ‘나는 건강하다’는 응답률은 OECD 국가 중 최저인 32.5%로, 미국(88.0%)은 물론 OECD 평균(68.3%)의 절반도 안 됐다. 반면 기대수명은 82.4세로 OECD 평균(80.8세)과 미국(78.6세)보다 훨씬 높은 4위였다. 주관적 건강상태보다 객관적 지표가 훨씬 좋다는 얘기다.하지만 건강염려증 덕에 오래 사는지도 모른다. 잔병치레를 할수록 잦은 검진으로 큰 병을 조기 발견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와 세계보건기구는 2030년 여성 출생자의 기대수명이 90세를 넘을 나라는 한국뿐이란 논문을 지난해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건강염려증과 김치(발효식품)가 한국인을 계속 건강하게 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건강염려증은 역설적으로 국민 위생보건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미세먼지 불안이 마스크 착용을 일상화하고, 메르스가 손씻기 습관을 들게 했다. 건강무심증보다는 건강을 신경쓰는 게 낫지 않을까. 뭐든 지나치지만 않다면.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