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귀족사회의 性생활이 난잡했다고?… 당시엔 '神國의 道' 였다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9) 花
춘추와 문희의 사랑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후일의 무열왕)가 공차기를 하다가 유신이 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가까운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려가 큰 누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끈을 꿰매라고 했다. 보희가 무슨 일이 있어 하지 못하고 작은 누이 문희가 대신했는데, 문희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춘추가 문희를 좋아해 혼인을 청했고 드디어 결혼했다. 아이를 낳으니 곧 후일의 문무왕이다.이 이야기가 1280년경의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도입부는 같다. 유신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을 꿰매라고 명하니 보희가 하찮은 일을 시킨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유신이 문희에게 명하니 문희가 따랐다. 이후 춘추와 문희가 사귀었는데 문희가 임신을 했다. 유신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다고 크게 성을 내며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소문을 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놀러 가기를 기다렸다가 유신이 뜰에다 장작을 쌓고 불을 붙여 연기를 피웠다. 여왕이 무슨 연기인지 좌우에 물어 전후 사정을 알게 됐다. 여왕이 춘추에게 “네 소행이니 빨리 가서 구하라”고 했다. 춘추가 왕명을 전하고 문희를 구한 다음 결혼을 했다.

《화랑세기(花郞世紀)》로 추정되는 원고가 있다. 이 원고에는 위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유신이 보희에게 춘추의 옷을 꿰매라고 시켰으나 병 때문에 할 수 없었다. 문희가 대신했는데, 유신이 자리를 피해줬다. 춘추와 문희가 사랑을 나눠 문희가 임신을 했다. 춘추에게는 보량이라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이에 춘추가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했다. 이에 유신이 마당에 장작을 쌓고 누이를 태워죽이려 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마침 선덕공주가 남산에서 놀다가 연기의 사연을 물으니 좌우가 사실대로 고했다. 공주가 춘추에게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고 했다. 춘추가 가서 문희를 구했다. 드디어 포사(鮑祠)에서 혼례를 올렸다. 얼마 있지 않아 보량이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정궁(正宮)이 됐다.

이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원초적인가. 나는 셋째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춘추와 문희를 결혼시키고자 했던 유신의 계략은 셋째 이야기에서 비로소 확연하게 설명된다. 사건의 연도를 헤아리면 남산에 올라간 사람은 선덕여왕이 아니라 선덕공주였다. 그 점도 셋째가 원작임을 증빙하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셋째가 축약되거나 변질된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한 면.
《필사본 화랑세기》의 출현

《화랑세기》는 8세기 초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책이다. 고려시대까지는 전해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편찬자도 참고했다. 이후 언젠가 그 책은 자취를 감췄다. 1995년 《화랑세기》로 추정되는 것이 박창화(朴昌和, 1889∼1962)란 사람이 원고지에 필사한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창화는 1923년 이후 일본에 거주했으며, 1933∼1944년 일본 궁내성 도서료(圖書寮)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박창화는 궁내성 도서료의 판심이 인쇄된 원고지에다 《화랑세기》를 필사했다. 이하 그 원고를 《필사본 화랑세기》라고 부른다. 박창화는 그것의 출처가 어딘지, 언제 필사한 것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공개되자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이 박창화나 누군가에 의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반응을 보였다. 주된 이유는 거기에 묘사된 신라 화랑의 모습이 《삼국사기》가 전하는 충절의 무사 그것과 너무 상이할뿐더러 신라 귀족사회의 성생활이 믿기 힘들 정도로 난잡하다는 것이었다.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土偶裝飾 長頸壺)’의 장식 부분. ‘신국(神國)의 도(道)’를 말해주는 장면.
진서설

그에 맞서 이종욱 교수는 박창화가 필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일본 어딘가에 있을 진서(眞書) 《화랑세기》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화랑도가 충절의 무사라는 이미지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만들어 낸 것이며, 신라 귀족들의 성생활이 난잡하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후대의 윤리기준에 입각한 선입견일 뿐이라고 위서설을 비판했다.

1980년대 후반 발굴된 경주 월성 주변의 구지(溝池).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서일 수 없는 강력한 근거다.
이 교수가 진서설의 근거로 제시한 여러 가지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경주 월성(月城)의 구지(溝池)다. 월성은 신라의 왕궁을 옹위한 성이다. 1980년대 후반 월성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월성에는 원래 그것을 둘러싼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는 여러 연못(池)과 그것을 잇는 도랑(溝)의 형태였음이 밝혀졌다. 구지는 8세기 이후 군사적 긴장이 사라짐에 따라 메워졌으며, 이후 1000년 이상 그것이 실재했음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월성의 벽 아래 그것이 설치됐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메워지기 이전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역사 정보다.

신의 나라

2002년 나는 별생각 없이 이 교수가 역주한 《필사본 화랑세기》를 읽었다. 나는 금방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 나오는 ‘노(奴)’, ‘비(婢)’, ‘천(賤)’ 글자의 용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내가 분석한 것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잠시 소개한 대로 삼국인에게 ‘노’라 함은 후대의 노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개인 내지 공동체 간의 정치군사적 신종관계를 대변했다. 예컨대 읍락의 지배층은 하층 성원을 ‘노’라고 불렀다. 백제왕은 고구려왕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을 ‘노객(奴客)’이라 칭했다. 이런 언어생활은 돌궐을 위시한 중국 주변의 유목 민족에 고유한 것인데, 삼국과 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의 용례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는 귀족에 대비된 평민의 신분을 지적할 때 ‘천’하다고 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노’와 ‘비’의 용례는 10회씩이다. 신라의 화랑도는 낭도→낭두→화랑의 세 계층으로 이뤄졌는데, 낭도는 품(品)이 없는 평민이다. ‘노’의 용례는 일관해 무품의 낭도를 가리켰다. 신라의 귀족 부인은 남편 이외에 평민 출신 젊은 남자와 성생활을 즐겼다. 귀족 부인은 낭도가 그의 내연남일 때 그를 사노(私奴)라고 불렀다. 반면 품을 가진 낭두는 칭노(稱奴)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칭신(稱臣)하거나 그 대상이었다. ‘비’ 용례는 귀족 신분의 여인이 적출(嫡出)이냐 서출(庶出)이냐에 따라 상하 신종하는 관계이거나 낭두의 처들이 화랑도의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 은총을 받는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이렇게 성적 서비스를 통해 상하가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하는 질서를 가리켜 ‘신국(神國)의 도(道)’라고 자부하고 있다. 신라인에게 신라는 ‘신의 나라’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천’ 용례는 9회인데, 《삼국사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무품의 평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대남보라는 낭도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딸을 풍월주에게 바쳐 골품을 얻으라고 권했다. 대남보가 거절하면서 “우리 무리는 천인인데 어찌 여색으로 풍월주를 미혹하겠는가”라고 했다.

집단오류

내가 보기에 이 교수의 진서설은 논리와 실증에서 위서설을 압도했다. 그럼에도 위서설이 여전히 다수를 점하고 있음은 국사학계의 주류가 공유해온 신라사 인식이 《필사본 화랑세기》의 그것과 너무 달라 진서로 수용할 경우 그 후유증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지 달리 진지한 학술적 근거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교수의 진서설을 지지했다.그러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필사본 화랑세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사건들을 비교해 봤다. 그중 하나가 앞서 소개한 춘추와 문희의 이야기다. 오리지널리티는 단연코 《필사본 화랑세기》 쪽이다. 20세기의 어느 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두 역사책의 문맥을 능가하는 이야기를 가짜로 지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귀신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춘추와 문희는 포사에서 혼례를 올렸다. 곧 포석정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제사나 혼례가 거행된 신전으로 추정된다. 누가 그 천고의 비밀을 미리 알아서 위서에다 그렇게 써 놓았단 말인가. 아무래도 국사학계 주류는 후과(後果)를 감당하기 힘든 집단오류를 범한 듯하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