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발카나이즈의 '축구 반란'

고두현 논설위원
영어 사전의 ‘발카나이즈(balkanize)’는 ‘발칸반도처럼 국가나 영토를 서로 적대시하는 약소국들로 분열시키다’라는 뜻이다.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는 발칸반도의 분열과 전쟁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지역의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 7개국은 분리독립 과정에서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사태’ 등 많은 피를 흘렸다.

옛 유고는 종교와 인종이 복잡하게 얽힌 연방이었지만, 축구에서는 발칸을 대표하는 강국이었다.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과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랐다. 올림픽에서는 1960년 로마 금메달을 비롯해 1948년 런던, 1952년 헬싱키, 1956년 멜버른에서 은메달을 땄다.1991년 연방 해체 후에도 ‘발칸 전사’들의 축구 실력은 줄지 않았다. 이 가운데 가장 실력이 뛰어난 크로아티아는 ‘발칸의 브라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강호 독일을 꺾고 4강에 진출했다. 이어 네덜란드까지 제압하며 3위에 올랐다. 2010년 남아공 대회만 빼고 모두 5차례나 본선에 진출했다. 올해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발칸 국가로서는 최초로 결승까지 올랐다.

이번 대회 ‘최고 선수’로 꼽히는 대표팀 주장 루카 모드리치(33·미드필더)는 6세 때 반군에게 할아버지가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살던 집도 불탔다. 그런 고통을 극복하고 ‘발칸의 기적’을 일궜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기적을 이해하려면 전쟁의 상처를 알아야 한다”며 “우리는 전쟁을 겪으면서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크로아티아의 성공 요인으로 유럽에서 가장 키가 크다는 유전적인 요소를 든다. 하지만 모드리치는 어릴 때 체구가 작아 소년팀 입단을 거부 당했다. 지금도 키 172㎝에 몸무게 66㎏에 불과하다. 그는 “끊임없는 훈련과 기술 개발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현대 축구에서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능력과 시야, 창의성 등을 모두 갖췄다”는 극찬을 받았다.영국 BBC는 “인구 410만 명밖에 안 되는 크로아티아의 성공은 스포츠 역사상 매우 특이한 사례”라며 선수들이 각자의 고난과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이룬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국제 기준에 맞는 경기장이 5개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장을 탓하지 않고 장비를 나눠 쓰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빌린 승합차 안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운 결과라는 것이다.

비록 졌지만 막판까지 명승부를 펼친 크로아티아 팀을 보면서 먼지투성이 공을 갖고 노는 폐허 속의 아이들을 새삼 떠올린다. ‘발카나이즈’로 찢긴 7개국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팀 덕분에 내전의 아픔을 씻고 처음으로 발칸반도가 하나로 뭉쳤다”고 외치는 소리도 크게 들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