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기업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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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관행이던 일들이 지금은 죄다 범법행위기업인은 눈물을 흘려도 기업은 울 수 없다. 법상의 사람, 법인이기 때문이다. 기업인은 교도소에 가도 기업은 법정관리에 들어갈 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기업인과 기업을 분리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기업 생태계 이해 못하면 경제정책 바로 못 펴
늦기 전에 세금·일자리 창출하는 기업 돌봐야
황영기 < 법무법인 세종 고문·前 금융투자협회장 >
예를 들어 보자. 성공한 대기업일수록 창업주 일가 지분율이 낮다. 그래서 쥐꼬리만 한 지분으로 전체를 주무른다고 비난받는다. 그런데 그 총수일가 중에 어느 누군가가 사고를 치면 전 그룹이 비난에 휩싸인다. 불매운동도 벌어진다. 이 경우는 시장이 기업인과 기업을 동일시한 경우다.반대로 기업인이 자신과 기업을 동일체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지분이 20%인 회사의 이익을 지분 80%인 회사로 옮긴다면 단박에 배임횡령죄에 걸린다. 둘 다 내 것인데 무슨 문제냐고 하다가 철창 뒤에 숙소를 마련한 기업인이 부지기수다.
기업인들 하소연을 들어 보면 사정이 참 딱하다. 과거엔 관행이던 일들이 지금은 죄다 범법 행위가 돼 겁난다는 것이다. 그 잘못된 관행 중 으뜸이 지배력 유지를 위한 꼼수들이다. 상속·증여세가 65%에 달하는 상황에서 일감 몰아주기나 계열사 분할합병 등을 통해 간신히 지분율을 유지해왔는데, 이것이 불법 증여·상속이나 조세 포탈 관점에서 보고 걸면 걸린다는 것이다. 차라리 기업공개를 안 하든가, 유상증자를 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별 대책은 없고, 그저 화살이 우리 회사를 향하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하소연이다.
왜 기업인들은 자식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저 난리를 쳤을까? 지분율 유지가 그렇게 중요하면 왜 회사를 키운다고 증자를 했을까? 이 회사는 내가 세운 회사이고, 내 자식 이상으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당연히 내가 지배해야 하고, 내 자식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증여세가 떡 버티고 있는 통에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편법을 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써 온 것일 게다.이제 상황은 급변했다. 대한민국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좋은 기업인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불법과 갑질을 일삼는 범죄집단의 추악한 수괴 같은 모습으로 국민들은 보고 있다. 기업 경영환경 또한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성 노조는 더욱 강력해지고 중소기업과 협력 업체에 대한 보호조치, 최저임금제, 주 52시간 근무제 등의 도입은 기업 대응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기업인들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대응하려 할까?
우선은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미투’와 갑질을 조심하고 매사에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회사 전체에 강력하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는 신규 투자와 고용을 극도로 꺼릴 것이다. 은행이 옛날 같지 않아 조금만 재무구조가 나빠져도 회수 작업에 돌입하고, 자본시장을 활용하려 하니 감독원 심사가 까다로운 데다 투자자 보호장치가 워낙 강력해 문제 발생 땐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한다.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부분은 해외 투자다. 해외엔 저임금이 있고 시장이 있다. 그래서 많은 기업인이 1년에 반 이상을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인들이 힘들다고 하면 정부가 나서서 애로사항을 들어 주고 지원대책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기업들이 고용과 투자를 통해 성장을 책임지고 있다는 확실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변해 기업을 돕는 것은 나쁜 기업인을 돕는 것처럼 돼 버린 듯하다. 대기업, 중견기업의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관심은 중소기업, 자영업자, 창업기업에만 쏠려 있다. 기업생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대기업이 시설 투자와 연구개발(R&D) 투자를 신나게 해야 중소기업과 창업기업이 먹고살고, 기업이 잘돼야 종업원들 주머니가 두둑해져서 자영업자들이 바빠지는 것이다.
기업과 기업인을 구분해서 보지 못하고,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자로 이어지는 기업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경제정책을 바르게 펼 수 없다. 대기업을 억누른다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되지 않는다. 기업인이 밉다고 기업을 혼내는 것은 쥐 잡는다고 곳간에 불 지르는 것과 다름없다. 더 늦기 전에 기업들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복지사회를 만들 세금과 일자리는 누가 뭐래도 기업들이 맡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