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째 추모물결…'노회찬 현상'은 참정치 갈구하는 민심

오늘 장례절차 국회장 격상…의사당 전면엔 추모 현수막
진보·보수 구분 없는 애도…2만3천여 추모객 빈소 방문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

'노회찬 국회의원 서거를 삼가 애도합니다'.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의 발인과 영결식을 하루 앞둔 26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전면에 검은색의 거대한 추모 현수막이 내걸렸다.애초 정의당장(葬)으로 치러질 예정이었던 장례 절차는 이날부터 국회장으로 위상이 격상됐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공동장례위원장을, 국회의원 299명 전원이 장례위원을 각각 맡게 됐다.
노 원내대표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지 나흘째, 고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날이 갈수록 더 뜨거워지고 있다.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는 이날 오전까지 2만3천여 명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매일 밤 늦게까지 긴 줄이 이어졌고, 꽤 많은 이들이 소리 내어 통곡했다.

시민 장례위원도 3천380명이나 모였다.고인과의 추억을 애틋하게 기억하는 선후배 정치권 인사들은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빈소를 찾았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공평하게 일반 시민과 나란히 줄을 서 오래 기다렸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가 드루킹 특검 수사에서 불거졌을 때 '출당 조치' 운운했던 일부 정의당원도 비난의 화살을 거두고 누구보다 슬퍼하는 분위기다.심상정 전 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의원단은 며칠새 밀려든 입당신청서와 후원금에 "모두 돌려드릴테니 노회찬만 다시 살려달라"고 말할 만큼 비통한 심정을 주변 동지들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노 원내대표를 향한 이런 추모 열기는 겸손하면서도 강단 있었던 고인의 인품을 방증한다.

숱한 어록을 만들어낸 노 원내대표는 정세를 한 마디의 비유로 축약해내는 '촌철살인'의 말솜씨로 이름을 떨쳤으나, 평소 일상에선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둘도 없는 동지였던 심상정 전 대표가 진보의 가치를 앞장서 외치고 설득하는 스타일이라면, 노 원내대표는 한발 물러서 이를 성심껏 지원하고 이견을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고 정의당 사람들은 말한다.

고인은 애초 민주평화당과의 공동교섭단체 결성에 난색을 보였으나, 당론이 모이자 금세 수긍하고 공동교섭단체 첫 등록 대표를 맡아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런 성격 덕분인지 고인은 진보정치 테두리 안에서 특정 정파에 크게 의존하지 않은 채 자기 노선을 지키면서도, 이른바 '주류'와 불화하지 않고 당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모교 경기고등학교 교훈이기도 한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을 삶의 모토로 삼았던 고인은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는 낭만주의자기도 했다.

환갑이 넘어서도 '소년' 같다는 평을 들은 고인이 우리 정치권에 남긴 족적은 우뚝하다.

정글 같은 여의도에서 노동자와 소수자, 약자를 대변하고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그의 정치철학은 생전에 발의한 수백 건의 법안을 통해 드러난다.

노 원내대표는 17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처음 입성한 직후인 2005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장애인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19~20대 국회에서도 서민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세특례제한법, 임차인의 계약갱신권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상가임대차보호법, 경영상 해고 요건과 절차를 강화한 근로기준법 등의 개정안도 줄지어 발의했다.
최근에는 국회 특수활동비를 전면 폐지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해 호응을 얻었다.

그의 이런 입법 활동은 정의당 지지율을 10%선 위로 올려놓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부패한 검찰과 재벌을 겨냥한 삼성 X파일 사건 폭로로 뜻하지 않게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원외에서 생활고를 겪다 끝내 정치자금법의 덫에 걸리고 만 그의 '실패'가 더 아이러니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노 원내대표는 생전에 진보정당의 '차기'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심(노회찬·심상정)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누구보다 부담을 느꼈을 그다.

20대 총선 당시 폐에 물이 차 호스를 꽂고 유세에 나설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으나, 정의당에서 1명이라도 더 지역구 의원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짜냈다고 한다.

정의당원들이 "대표님 이제 편한 곳에 가서 쉬실 수 있게 됐다"고 서로 위로하는 것은 노 원내대표가 당 안팎에서 지고 있던 책임감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인에 대한 추모 열기는 거꾸로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지금의 추모 열기를 진보정치에 대한 이념적인 지지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면서 "자기 말에 일관성이 있고, 공적 책임을 지고, 헌신하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강한 바람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정치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신뢰는 참 낮다"며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 답답한 부분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정치인에 대한 갈급이 고인에 대한 추모 속에서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정의당은 이날 오후 7시 연세대 대강당에서 추도식을 엄수한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와 유시민 전 대표, 영화배우 박중훈 씨, 부산중·경기고 동창,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동지, 경남 창원 주민이 차례로 추도사를 낭독한다.'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노회찬의 마지막 가는 길은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이 함께한다.
/연합뉴스